기다림의 무게

“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by 청아

정말 오랜만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쓰는 글인데 속상했던 일을 쓰게 되었지만 저와 비슷한 경험들이 있을 것 같아 제 글을 공개합니다.


6월 초, 제21대 대통령선거와 함께 징검다리 연휴가 이어졌다.
나는 기업부설연구소 등록을 위해 서류를 정성스럽게 정리해 접수했다.
처음 하는 업무였기에 연구개발 내용도 신중히 검토하며, 누락이 없도록 꼼꼼히 작성했다. 여기 회사를 입사하기 전에 일했던 곳에서는 회계업무만 했기에 이런 서류 업무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도 했지만 확인을 거쳐 일을 처리했었다.


처리 기한은 통상 열흘 정도.
공공기관 고객센터 상담원의 말처럼 나는 차분히 기다렸다. 중간중간 진행 상황을 확인했고, 그때마다 돌아온 답은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담당자가 곧 연락드릴 겁니다.”였다.
오늘도 퇴근 전에 다시 확인했지만, 여전히 '처리 중'이었다. 그래서 내일까지 기다려보자고 생각했다.
그 선택이, 잘못이었을까?

오늘, 대표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담당자에게 재촉하면 빨리 처리되는데, 그냥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말이 되나?”
그 말속에는 내가 일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어쩌면 책임감이 부족했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나는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은 점에 대해 사과했지만, 그 말 한마디에 억울함이 밀려왔다. 억울함보다는 서운함이 클지도 모르겠다.

회사 입사 했을 때는 이런 업무들은 대표가 다 했지만 본인이 하는 일의 과부하가 걸려 조금씩 나에게 넘어온 일들이다. 변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나의 업무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보이지 않는 노력들

매일 아침, 쌍둥이 아이들을 깨워 등원시키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남편은 해외 출장 중이고, 나는 홀로 육아를 전담하고 있다.

다른 직원들이 재택근무를 하는 동안,
나는 사무실로 출근한다.
경영지원 업무 전반(회계, 인사, 총무)을 담당하고 있어서 사원이라는 직급이지만 사실상 관리자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경험을 한 경력자이지만 아이 출산으로 8년 가까이 경력 단절된 시간들이 있었기에 사원이라는 직급이 더 편하기도 하다.
대표의 “사무실에 있어주면 좋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 말 하나로 나는 매일 사무실로 향한다.

그 모든 일상 속에서도 업무는 빠뜨린 적 없고, 맡은 일은 언제나 기한 내에 마무리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들은 보이지 않는다.
출근길에도 머릿속은 업무로 가득 차 있고, 수시로 올라오는 회사 직원들과 함께 사용하는 슬랙의 메시지들, 퇴근 후에는 아이들 식사와 잠자리 챙기랴 다시 숨 돌릴 틈이 없다.
출퇴근 시간은 유연하게 사용하지만, 정작 내 업무는 밤늦게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그 누구도, 이런 일상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다.


기다림도, 하나의 선택이었다

나는 절차를 믿었다. 공공기관의 안내를 따랐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조용히 기다렸다. 그것이 시민으로서, 또 직장인으로서의 바른 태도라 생각했다.

무작정 재촉하기보다는, 예의 있게 기다리는 것이 맞다고 여겼다.
게다가 그동안 맡은 업무들도 모두 기한 내에 무리 없이 완료됐던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럴 거라 믿었다.

하지만 오늘, 그 기다림이 ‘소극적인 태도’로 평가되었다.
그 순간 나는 혼란스러웠다. 정말 내가 잘못 판단한 걸까?
내가 부족했던 걸까?

한편으로는 빨리 처리를 해달라고 재촉을 해서 처리가 된 경험들이 많았기에 대표 입장에서는 기관에서 기다리라고 했다고, 잠자코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한들 내가 알 수가 있나.


그동안 경험하지 않았던 일들을 새롭게 적응하느라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크게 잘못한 게 없다 하더라도 어차피 대표는 내가 일을 빠르게 처리하지 못한 게 잘못한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는 게 서로 더 이상 얼굴 붉힐일이 적으리라.


이 글은 그런 속상한 마음을 토닥이기 위해, 그리고 나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쓰고 있다. 그리고 속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닭발도 시켜서 배부르게 먹었다. 늦은 시간에 먹어서 잘 수 있을지, 살은 당연히 찔 것이다.


“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누군가의 기준에 다다르지 못해도 괜찮다.
중요한 건,
우리가 성실하게, 책임감 있게,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홀로 수많은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당신의 하루는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고 소중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린 땀과 눈물, 그 모든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


다시, 일어서는 법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는 첫걸음은 자신의 노력을 인정하는 일이다.

나는 오늘도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내일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다른 방식이 필요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까지 내가 선택해 온 방식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재촉도, 기다림도 그중 하나일 뿐이다.
중요한 건, 그 순간 내가 믿고 선택한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오늘을 마무리하며


오늘 밤, 쌍둥이들을 재운 뒤 나는 이 글을 다시 읽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할 것이다.

“수고했어, 오늘도.”

당신도 그러길 바란다.


당신의 노력을, 당신의 감정을, 그리고 당신의 존재를 스스로 인정하고 토닥여주길.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다. 그래서 더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해야 한다.
지금 당신이 느끼는 이 복잡한 감정들조차 당신의 성장을 위한 발판이다.

당신은, 정말로,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세상의 모든 ‘보이지 않는 노력들’에게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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