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다시 선택의 시간

by 청아

새벽안개가 정원을 덮었다. 한때 화려했던 기억의 나무들은 이제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서 있었다.


에일라는 가장 큰 나무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옷은 며칠째 같은 것이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또 왔네."


정원 입구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에일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매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이었다.


"에일라! 나와! 내 아들의 기억을 돌려놓으라고!"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제가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당신이 우리 가족을 망쳤어요!"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목소리들이 정원을 에워쌌다. 에일라는 더 작게 몸을 웅크렸다.

하진은 며칠째 정원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을 막으면서도, 그들의 아픔을 외면할 수는 없어서 괴로웠다.


"에일라는 지금 아파요. 돌아가 주세요." 하진이 간청했다.

"아파?" 한 여성이 비웃었다.

"우리는 죽을 만큼 아픈데, 그녀가 아프다고요?"


하진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의 말도 틀리지 않았으니까.

정원 안쪽에서 에일라는 천천히 일어났다. 나무의 뿌리 근처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미안해." 그녀가 뿌리에 손을 대며 속삭였다.

"내가 너희를 아프게 했구나."


뿌리는 예전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무들이 사람들의 욕망에 지쳐 스스로를 차단해 버린 것 같았다.

에일라의 힘도 줄어들고 있었다. 한 사람의 기억을 지우는 데도 예전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나오던 은은한 빛도 이제는 간신히 깜빡일 뿐이었다. 점점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고, 조금씩 존재가 옅어지고 있었다.


"당신은 이제 떠나는 게 좋겠어요."


하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정원 안으로 들어왔다.

에일라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디로요?"

"어디든. 이곳이 아닌 곳으로. 당신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곳으로."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청아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쌍둥이를 키우며 매일의 일상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배워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은 언제나 새롭고, 그 안에서 작은 통찰을 발견하며 글을 씁니다.

180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총 23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09화8화. 기억의 꽃잎이 흩날릴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