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그림자의 웃음

by 청아

1. 경계의 균열

새벽 4시. 수원 영통구 청명마을 단오어린이공원 주변은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평온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기 자체가 무겁고 끈적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안개가 도시 전체를 덮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진은 기억의 나무 앞에서 밤을 새웠다. 어젯밤 검은 꽃잎들이 사라진 후에도 그 기운은 여전히 정원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나무의 뿌리 근처 흙이 미세하게 검게 변하고 있었고, 주변의 잔디들도 서서히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기록하자."

하진은 기자수첩을 펼쳤다.


[기억의 수호자 일지 - 2일 차.
오전 4시 17분. 정원의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검은 꽃잎의 영향으로 추정되는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무 주변 반경 3미터 내의 식물들이 점진적으로 시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가 펜을 멈췄다. 시들어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자라나고 있었다. 검은 새싹 같은 것들이 썩어가는 뿌리 사이에서 돋아나고 있었다. 그것들은 일반적인 식물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마치 작은 손가락처럼 생긴 검은 줄기들이 땅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멀리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2. 감정의 폭발

영통구 매탄동의 한 아파트 단지. 평소라면 조용했을 새벽 시간대에 여러 세대에서 동시에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왜 그래! 왜 자꾸 짜증이 나는 거야!"


15층 1501호에서는 평소 온화하기로 소문난 주부 이미경(45)이 갑자기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이유는 없었다. 단지 남편이 화장실에서 나오는 소리만 들었는데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여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몰라! 모른다고! 그냥... 그냥 모든 게 다 싫어!"


같은 시각, 7층에서는 평소 과묵했던 대학생 김준호가 방에서 물건들을 집어던지고 있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그가 갑자기 세상 모든 것에 분노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모든 게 다 무슨 의미야! 공부를 해서 뭐 해, 미래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의 어머니는 당황스러워했다. 준호는 원래 차분하고 이성적인 아이였다. 그런데 새벽부터 갑자기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아파트 곳곳에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평소 감정 표현이 서투르던 사람들이 갑자기 울화통을 터뜨리거나, 반대로 늘 밝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들 모두 어젯밤 창문을 통해 검은 꽃잎들이 흩날리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3. 무뎌진 마음들

한편, 수원역 근처 상가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카페 '따뜻한 하루'의 사장 박소영(38)은 어젯밤 이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단골손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가게 앞에서 교통사고가 나도, 심지어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 향을 맡아도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해... 왜 이럴까?"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없었다.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는 완벽하게 무표정한 얼굴. 마치 감정이라는 기능 자체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얼굴이 너무 하얘 보여요."


단골손님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박소영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걱정해 준다는 것이 고맙다는 감정도, 미안하다는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다.


근처 문구점의 할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손자가 찾아와서 안겨도 아무런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기계적으로 "그래, 왔구나"라고 말할 뿐이었다.


두 현상은 정반대였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감정의 조절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감정이 폭발했고, 어떤 이들은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4. 잊힘의 등장

오후 3시. 하진이 정원에서 이상 현상들을 조사하고 있을 때, 갑자기 공기가 차갑게 변했다. 주변의 소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완전한 정적이 흘렀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청아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쌍둥이를 키우며 매일의 일상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배워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은 언제나 새롭고, 그 안에서 작은 통찰을 발견하며 글을 씁니다.

180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총 23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15화청명의 마녀 시즌2 : 검은 꽃이 피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