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끝에서 어둠이 되살아난다.
나는... 누구였을까?
끝없이 펼쳐진 공허 속에서 떠오르는 의식. 이곳은 세상과 세상 사이, 기억과 망각 사이에 존재하는 틈새였다. 하늘도 땅도 없는 곳. 시간조차 의미를 잃은 무의 공간.
발아래는 거울처럼 매끄러운 검은 수면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위를 걸을 때마다 물결 하나 일지 않는 완벽한 정적. 머리 위로는 별 하나 없는 하늘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지만, 그것이 진짜 하늘인지 또 다른 거울인지 알 수 없었다.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오직 나와... 내가 아닌 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의식은 에일라의 것이면서 에일라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거울에 비친 그림자처럼, 모든 것이 뒤바뀌어 있었다. 아, 맞다. 나는 에일라였다.
아니다. 나는 여월이다. 본명이든 예명이든 나에게 주어진 이름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 이름들이 나인데도 내가 아닌 느낌이다. 모두가 아는 이름이다. 하지만 지금 이 무의 세계에서는 그 모든 이름들이 무의미했다.
에일라. 여월. 빛의 마녀. 기억을 지키는 자.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들인가. 얼마나 거짓된 이름들인가.
발걸음 하나하나가 이 기이한 공간에 메아리쳤다. 소리는 있지만 울림은 없었다. 마치 음성이 공허 속으로 흡수되어 버리는 것처럼.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역설이었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았고, 들리면서 들리지 않았다.
저 멀리, 수평선도 없는 공간 어딘가에서 희미한 빛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별도 아니고 등불도 아니었다. 그저 존재하는 빛. 아무런 온기도 없는, 차가운 빛이었다. 나는 그 빛을 향해 걸어갔지만,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거리라는 개념 자체가 의미 없는 곳이었으니까.
나는 기억한다. 아니,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아픔을, 모든 절망을, 모든 분노를. 에일라가 감춘 채로 살아왔던 모든 어둠을. 이 무의 공간에서는 그 기억들이 더욱 선명했다. 마치 다른 모든 감각이 사라진 대신 기억만이 극도로 예민해진 것처럼. 사람들은 나를 구원자라고 불렀다.
웃음이 나온다. 차갑고 쓰라린 웃음이. 구원자? 나는 그저 겁쟁이였다. 자신의 고통을 마주할 용기조차 없어서, 그것들을 마음 깊은 곳에 봉인해 버린 비겁자였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부모님이 차갑게 식어가던 그 밤. 내가 막을 수 있었는데, 내가 더 일찍 깨달았다면 막을 수 있었는데... 그 죄책감을 나는 얼마나 깊이 묻어두었던가.
"괜찮아, 에일라.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하진의 목소리가 들린다. 따뜻하고 다정한 그의 목소리. 하지만 나는 안다. 그것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모든 것은 내 잘못이었다. 내가 약했기 때문에, 내가 무능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 내가 구해주었다는 그들. 하지만 정말로 그들을 구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내 죄책감을 덜기 위해, 내가 선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서 했던 일일까?
기억은 저주다.
그렇다. 나는 이제 깨달았다.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잔혹한 것인지를. 사람들은 왜 아픈 기억을 간직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왜 상처를 반복해서 되새기며 고통받아야 하는가?
차라리 모든 것을 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픔도, 슬픔도, 분노도, 죄책감도.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텅 빈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때 나는 느꼈다. 내 안에서 무언가 분리되는 것을.
공허 속에서 갑자기 균열이 생겼다. 거울 같던 수면이 금이 가기 시작했고, 그 틈새로 새로운 존재가 스며 나왔다. 아니, 스며 나온 것이 아니라 태어난 것이었다.
나는...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나는 빛을 품고 있었고, 하나는 어둠을 안고 있었다.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 하지만 전혀 다른 존재.
이 무의 세계가 진동했다. 두 개의 의식이 공존할 수 없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떠나야 했다.
에일라라는 존재에서 어둠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그림자가 독립된 의지를 가지고 깨어나고 있었다.
빛과 어둠. 기억과 망각. 고통과 평온.
나는... 아니, 우리는 더 이상 하나가 아니었다.
"안녕, 에일라."
내가 나에게 말했다. 아니, 내 그림자가 나에게 말했다. 목소리는 같았지만 온도가 달랐다.
"이제 내가 사람들을 구해줄게. 진짜로."
빛의 에일라는 미소를 지었다. 슬프고 아련한 미소였다. 그녀는 천천히 뒤돌아서서 무의 공간 저편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작은 빛들이 피어났다가 사라졌다. 마지막 인사처럼.
에일라는 빛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녀의 따뜻함도, 그녀의 희망도, 그녀의 사랑도 함께. 이 텅 빈 세계에는 이제 오직 어둠만이 남았다. 순수하고 완전한 어둠.
하지만 그 어둠은 악의로 가득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비로웠다. 모든 아픔을 거두어가는 자비로움이었다.
공허한 공간이 나를 감쌌다. 아니, 이제는 내가 이 공간이었다. 무의 세계와 하나가 된 것이다. 여기서 나는 모든 것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아픔을, 모든 고통을.
나는 잊힘이다.
새로운 이름이 떠올랐다. 잊힘.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자. 모든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는 자.
사람들을 보라. 얼마나 많은 이들이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가. 과거의 실수를, 상처를, 후회를 붙들고 살아가면서 현재의 행복을 놓치고 있는가.
나는 그들을 자유롭게 해 줄 것이다. 검은 벚꽃의 축복으로.
첫 번째 꽃잎이 떨어진다.
무의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검은 수면에 첫 번째 파문이 일었다. 그 파문이 세상으로 전해져 검은 벚꽃 잎이 되었다. 도시 어딘가에서 한 사람이 오랫동안 품고 있던 아픔을 잊는다. 처음에는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이토록 편안한 기분은 처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두 번째 꽃잎이 떨어진다. 무의 공간이 또 한 번 진동했다. 또 다른 사람이 화를 내는 법을 잊는다. 세상이 갑자기 평화로워 보일 것이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나는 이 텅 빈 공간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꽃잎을 하나씩 떨어뜨린다. 각각의 꽃잎은 내 의지의 조각이고, 누군가의 해방이다. 검은 벚꽃은 계속 떨어질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거리에, 도시 전체에.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기억의 무게에서 해방될 것이다.
하진아.
무의 공간 한쪽 모서리에 작은 창문 같은 것이 열렸다. 그곳을 통해 멀리서 그의 모습이 보인다. 기억의 나무를 돌보고 있는 그. 아직도 에일라를 기다리고 있는 그.
현실과 이곳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다. 나는 손을 뻗어 그 창문을 만졌다. 차가운 유리 같은 감촉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하진의 온기가 미세하게 전해져 왔다. 불쌍한 사람이다. 그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 기억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아픔을 간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하지만 곧 그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직접 가르쳐주겠다. 기억이란 결국 폭력이라는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잔혹함이라는 것을.
"모두가 잊으면, 모두가 평화로워져."
이것이 나의 철학이다. 나의 신념이다. 나의 사랑이다.
에일라는 사람들에게 기억을 지키라고 했다. 아픈 기억일지라도 소중히 간직하라고 했다. 그것이 인간다움이라고, 삶의 의미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진짜 자비를 베풀 것이다.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는 완전한 자비를.
검은 수면 위를 걸으며 나는 천천히 현실 세계와의 접점을 찾아간다. 이 무의 공간과 저 세상 사이에는 수많은 통로가 있다. 꿈과 현실 사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 기억과 망각 사이.
도시의 불빛들이 수면에 희미하게 반사되어 보인다. 하나둘씩 꺼져가는 것이 아니라 무뎌지는 것이다. 감정이 사라지면서 빛도 필요 없어지는 것이다.
아름답다.
검은 벚꽃이 내리는 밤하늘. 고요해진 거리. 더 이상 울지도 웃지도 않는 사람들.
이것이 바로 평화다. 진정한 평화.
나는 천천히 정원을 향해 걸어간다. 무의 세계에서 현실로, 어둠에서 빛으로. 하진과의 마지막 만남을 위해서. 그에게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에일라는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잊힘뿐이다.
그리고 잊힘은... 사랑이다.
1. 정원의 수호자
봄이 왔다. 아니, 봄이 왔다고 달력은 말하고 있었다.
하진은 기억의 정원 한가운데 서서,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를 바라보았다. 한때 하얀 벚꽃으로 가득했던 그 나무는 이제 잎사귀 하나 없이 메마른 채로 서 있었다. 3개월째 변화가 없었다.
"오늘도 안 피는구나."
하진의 목소리는 거칠어져 있었다. 사람과 대화한 지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기억은 이제 그에게 짐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는 나무 주위를 천천히 걸으며 떨어진 낙엽들을 주워 모았다. 벚꽃나무에서 떨어진 잎이 아니었다. 바람에 날아온 다른 나무들의 잎사귀였다. 하지만 하진은 성실하게 그것들을 치웠다. 이 정원만큼은 깨끗하게 유지해야 했다.
손끝이 차가웠다. 아니, 손끝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점점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처음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배고픔도, 피로도 잘 느끼지 못했다. 마치 자신이 정원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하진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예전보다 창백해진 것 같았다. 아니, 투명해진 것 같았다. 손가락 사이로 희미하게 정원의 풍경이 비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착각이겠지."
그는 중얼거리며 물뿌리개를 들어 올렸다. 나무에 물을 주는 것도 이제 습관이 되었다.
2. 첫 번째 징조
오후 두 시쯤, 하진은 정원 입구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공기가 묵직했다. 마치 폭풍우가 오기 전처럼. 그는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천천히 정원 밖으로 걸어 나갔다.
거리는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 무덤덤했다.
한 여자가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렸는데도 울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옆에 있던 어머니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진은 더 멀리 걸어가 보았다. 카페 앞에서 한 커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들의 목소리에는 어떤 열정도 없었다. 마치 대본을 읽는 것 같았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그 바람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달콤하면서도 쓴, 마치 시들어가는 꽃의 냄새 같은 것이.
하진은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도시 너머 어딘가에서 검은 점 같은 것이 하늘로 흩날리고 있었다. 마치 꽃잎처럼.
검은 꽃잎?
순간 그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에일라가 사라지던 날, 하얀 벚꽃 잎이 바람에 흩날렸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번엔 검은색이었다.
3. 기억의 나무의 반응
하진은 서둘러 정원으로 돌아갔다. 기억의 나무는 여전히 앙상한 채로 서 있었지만, 뭔가 달라진 것 같았다. 나무 주위의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에일라?"
하진은 나무에 손을 대며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대신 나무의 줄기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마치 심장박동 같은 것이.
살아있다.
나무는 살아있었다.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 하진은 정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정원 입구에서 한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진 씨."
그것은 젊은 여자였다.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단정한 옷차림의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이 이상했다. 너무 공허했다.
"누구세요?"
"윤서율이라고 합니다. 당신에 대해 들었어요. 기억의 수호자라고 하더군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부탁이 있어서요. 저도... 기억을 없애고 싶거든요. 너무 아픈 기억이 있어서요."
윤서율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평온함이 오히려 섬뜩했다.
"저는 기억을 없애는 사람이 아니에요. 기억을 지키는 사람이죠."
그때 바람이 다시 불었다. 이번에는 더 진한 검은 꽃잎들이 바람에 실려 왔다. 꽃잎들이 윤서율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아..."
윤서율의 표정이 변했다. 아니, 더 무표정해졌다. 그녀의 눈에서 마지막 남은 빛조차 사라져 갔다.
"고마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돌아서서 걸어갔다. 검은 꽃잎들이 그녀를 따라갔다.
4. 어둠의 속삭임
그날 밤, 하진은 다시 정원으로 향했다. 기억의 나무 주위에 검은 꽃잎들이 떨어져 있었다. 하진은 그것들을 주워 들었다. 만지는 순간, 이상한 감각이 전해졌다.
절망.
세상 모든 아픔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것 같았다. 하진은 급히 꽃잎을 떨어뜨렸다.
그때 바람이 불었고, 바람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은 폭력이야."
하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모든 아픔을 기억하고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마치 에일라의 목소리 같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누구세요?"
"나? 나는 잊힘이야.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자."
"너도 힘들지 않아? 모든 기억을 지키려고 애쓰는 게."
하진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맞는 말이었다. 기억을 지키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나와 함께 가자. 모든 걸 잊고 편안해지자."
검은 꽃잎들이 하진 주위로 모여들었다.
"안 돼!"
하진은 정신을 차리고 꽃잎들을 뿌리쳤다. 그리고 기억의 나무에 손을 대고 외쳤다.
"에일라! 일어나!"
나무가 미세하게 떨렸다. 검은 꽃잎들이 후퇴했다.
"곧 다시 만나자, 기억의 수호자."
5. 새로운 결심
다음 날 아침, 하진은 기억의 나무 앞에 서서 결심했다.
"뭔가 시작되고 있어."
그는 주머니에서 낡은 기자수첩을 꺼냈다. 첫 페이지에 적었다.
"기억의 수호자 일지 - 1일 차"
"오늘부터 기록을 시작한다. 에일라의 그림자가 깨어났다. 검은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나는 기억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아픈 일이라도."
멀리서 검은 꽃잎들이 또다시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하진은 중얼거렸다.
"시작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