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 기억의 끝에서 어둠이 되살아나다

by 청아

작가의 노트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남는다. 청명의 마녀는 잊힌 이들의 기억 속에서 피어난다."


달빛이 사라진 밤

수원 영통구 청명마을의 단오어린이공원.

그로부터 석 달이 흘렀다.

에일라가 마지막 벚꽃을 피우고 사라진 그날 이후, 500년 된 느티나무는 다시 평범한 보호수로 돌아왔다. 관공서에서 파견된 수목 전문가들은 번개로 갈라진 틈을 메우고, 철제 지지대로 나무를 보강했다. CCTV는 새것으로 교체되었고, 공원에는 '출입금지' 팻말이 세워졌다가 한 달 뒤 조용히 철거되었다.

사람들은 그날 밤의 기억을 점차 잊어갔다.

"꽃비가 내렸다던데?" "에이, 번개에 놀란 거겠지." "무슨 마녀 같은 소리야. 집단 착각이었대."

하지만 정하진만은 매일 밤 그곳을 찾았다. 카메라 없이, 그저 낡은 벤치에 앉아 나무를 올려다보며.


검은 꽃봉오리

첫 번째 이상 징후는 가을비가 내리던 날 시작되었다.

하진이 늘 앉던 벤치 아래, 작은 검은 점이 하나 생겼다. 처음엔 그저 썩은 나뭇잎이거나 벌레 사체쯤으로 여겼다. 그런데 다음 날, 그 검은 점은 손톱만 한 꽃봉오리가 되어 있었다.

검은 벚꽃.

에일라가 피우던 분홍빛 벚꽃과는 완전히 다른, 빛을 삼키는 듯한 검은색이었다. 하진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꽃봉오리 주변의 풀이 말라죽어가고 있었다. 마치 생명력을 빨아들이듯이.

그리고 그날 밤, 하진은 꿈을 꾸었다.


그림자의 목소리

하진은 꿈속에서도 에일라를 찾았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기억이 그렇게 소중한가요?"

꿈속의 에일라는 달랐다. 한복이 아닌 검은 드레스, 따뜻했던 눈빛 대신 차가운 무표정. 그녀는 하진 앞에 서서 작게 웃었다. 아니, 그것은 에일라가 아니었다.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 하지만 완전히 다른 존재.

"저는 '잊힘'이에요. 그녀가 거두지 못한 기억들, 지워지지 못한 아픔들이 모여 태어났죠."

하진이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영통구 전역에 흩날리는 검은 꽃잎들이었다. SNS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기억을잃은사람들 #검은꽃잎 #망각의바이러스


깨진 균형

에일라가 500년간 지켜온 균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기억의 나무가 사라지면서, 그녀가 봉인했던 것들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픔과 아픈 기억을 거두는 자가 사라지자, 아픔 자체가 형체를 얻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무서운 건, 잊히는 것을 두려워하던 인간이 이제는 잊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잊고 싶어요." "기억이 없으면 아프지도 않겠죠?" "그 검은 꽃을 파는 곳이 있대요. 망각의 차라고..."

청명마을 뒷골목, 작은 찻집이 하나 생겼다. 간판도 없는 그곳에서 검은 꽃잎을 우린 차를 마시면, 원하는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새로운 선택

하진은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이번엔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싸우기 위해서였다. 에일라가 남긴 마지막 벚꽃 한 송이를 가슴에 품고, 그는 검은 꽃이 퍼져가는 도시를 향해 걸어갔다.

'기억은 아픔이 아니라, 인간됨의 조건이다.'

에일라가 사라지기 전 남긴 마지막 말이 그의 귓가에 울렸다. 모든 빛은 그림자를 동반한다. 그리고 이제, 그 그림자와 맞설 시간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그것은 기억을 잃은 자들의 텅 빈 웃음이었다.


"당신의 기억, 지켜도 괜찮겠습니까?"

검은 벚꽃이 만개하는 밤,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
그것은 잊힘과 기억, 두 세계의 전쟁이었다.

이전 13화12화. 피어나는 어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