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서율의 갈등 ]
오후 세 시, 청명마을 단오어린이공원 벤치에 윤서율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 위에는 검은 꽃잎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작고 무해해 보이는 꽃잎이었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힘은 절대적이었다. 망각. 완전하고 영원한 망각.
"이거 하나면... 끝이구나."
윤서율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며칠 전부터 그녀는 이 꽃잎을 가지고 다녔다. 하지만 아직 사용하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에 항상 주저했다.
기억을 지우면 정말 편해질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잃게 될까? 그때 하진이 나타났다. 그는 며칠째 윤서율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도 결정 못 하셨나요?"
윤서율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는... 제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기억이 너무 아파서, 저를 정의하는 모든 것들이 고통뿐이라서."
"어떤 기억인데요?"
"언니요. 제 언니가... 세 살 때 실종됐어요."
하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가 언니를 보지 못했어요. 엄마가 잠깐 마트에 간 사이, 저는 텔레비전만 봤어요. 언니가 없어진 줄도 몰랐어요."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해요. 하지만..." 윤서율이 떨리는 손으로 검은 꽃잎을 만졌다. "제가 조금만 더 신경 썼다면, 언니는 지금도 살아있을 거예요."
"확신하나요?"
"네?"
"언니가 죽었다고 확신하시나요?"
윤서율은 처음으로 하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경찰도, 가족도, 아무도 찾지 못했어요."
"그럼 아직 끝난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검은 꽃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 진실의 목소리 ]
그 순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차갑고 날카로운 웃음소리.
"감동적인 조언이네."
공원 저편에서 한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얼굴은 에일라와 똑같았지만, 눈빛이 전혀 달랐다.
"누구...?"
"모란이야."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목단꽃 모란(牡丹). 화려하지만 가시가 있는 꽃이지."
하진은 뒤로 물러섰다. 그녀에게서 위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당신이... 잊힘?"
"잊힘이라니. 너무 딱딱한 이름이야." 모란이 윤서율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나는 그냥 진실을 말하는 사람일 뿐이야."
"무슨 진실요?"
"기억이라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에 대한 진실." 모란이 윤서율의 옆에 앉았다.
"언니를 잃었다고? 그게 네 잘못이라고?"
"맞아요..."
"거짓말." 모란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네가 아무리 지켜봤어도 언니는 사라졌을 거야. 그게 운명이었으니까."
윤서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하진이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모란은 그를 무시했다.
"사실을 말하는 게 뭐가 잘못이야?" 모란이 검은 꽃잎을 집어 들었다.
"이 아이는 지난 20년 동안 존재하지도 않는 죄책감을 안고 살았어. 그 모든 시간이 낭비였다는 걸 알아야 하는 거 아냐."
"그건..."
"네가 언니를 지켰다고 해서 뭐가 달라졌겠어? 세상은 원래 잔혹한 거야. 아이들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죽고, 사랑하는 이들은 떠나가. 네가 그걸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윤서율이 고개를 떨궜다.
"저는..."
"기억을 지우면 편해져. 죄책감도, 후회도, 그 모든 무의미한 감정들도." 모란이 꽃잎을 윤서율의 손에 올려놓았다. "이걸로 끝내."
[ 에일라의 그림자 ]
하진이 모란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누구예요? 정말로?"
모란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하진은 깨달았다. 그녀의 눈 속에 에일라의 잔상이 남아있다는 것을.
"나는 에일라의 그림자야." 모란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가 평생 숨겨온 어둠의 조각."
"에일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정말?" 모란이 비웃었다. "그럼 에일라가 왜 사람들의 기억을 지워줬을까? 정말 선의였을까?"
하진은 말문이 막혔다.
"에일라도 알고 있었어. 기억이 폭력이라는 걸. 아픈 기억을 간직하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모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겁쟁이였어. 진실을 직면할 용기가 없었지."
"그게 무슨..."
"에일라는 자기 자신의 기억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어." 모란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였다. "부모님이 죽던 날,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하던 순간들, 500년 동안 혼자였던 외로움... 그 모든 걸 마음 깊이 묻어둔 채로 살았어."
바람이 불어왔다. 검은 꽃잎들이 공원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봉인된 감정들이 바로 나야. 에일라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
[ 새로운 이름의 의미 ]
윤서율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당신은 누구예요?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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