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은 작가 『연필』
연필을 깎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나무 부스러기가 돌돌 말리며 떨어지는 그 순간,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김혜은 작가의 『연필』은 바로 그 찰나의 순간에서 시작됩니다. 초록빛 연필 한 자루. 깎인 자리에서 흘러내리는 것들이 나뭇잎이 되고, 그 나뭇잎들이 모여 숲이 됩니다.
침묵으로 말하는 작가, 김혜은
김혜은 작가는 글 없는 그림책으로 세계와 대화합니다. 『연필』은 2022년 볼로냐 라가치상 어메이징 북쉘프에 선정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고, 2025년에는 뉴욕타임즈와 뉴욕시립도서관이 선정한 올해의 그림책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역설의 미학을 보여줍니다. 텍스트의 부재는 오히려 독자에게 무한한 상상의 공간을 선물합니다. 김혜은 작가는 이미지만으로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독자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초대합니다. 마치 연필 부스러기에서 숲을 발견하듯, 우리는 그의 그림 속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작가도 연필을 깎으면 나무가 되고 숲이 되는 엉뚱한 상상력에서 시작하지만 메세지는 무겁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글자 하나 없는 이 그림책은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연필 부스러기가 나뭇잎이 되는 상상력. 이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연필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시선입니다. 연필은 나무였고, 나무는 숲의 일부였으니까요. 페이지를 넘길수록 숲은 점점 풍성해집니다.
다채로운 색과 형태의 나무들, 그 사이를 거니는 작은 생명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숲은 역설적이게도 '깎여나간' 것들로 만들어집니다. 창조와 소멸이 동시에 일어나는 이 기묘한 순환 속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쓰고 그리는 것들의 무게
연필로 우리는 무엇을 하나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지우고, 다시 씁니다. 문명의 기록들, 예술의 흔적들, 아이들의 낙서까지. 그 모든 창작의 이면에는 어딘가의 나무가, 숲이 있었습니다.
"사람만이 살릴 수 있고, 사람만이 망가뜨릴 수 있는" 이 신비한 숲 앞에서, 우리는 창조자인 동시에 파괴자입니다. 연필을 쥔 손은 새로운 세계를 그려낼 수도, 기존의 것을 지워버릴 수도 있습니다.
조용한 해설자가 건네는 질문
이 책을 덮고 나서, 여러분의 책상 위 연필을 다시 바라보게 되실 겁니다.
그때 여러분은 무엇을 보실 건가요? 단순한 필기도구를 보실 건가요, 아니면 한때 숲이었던 생명의 흔적을 보실 건가요?
우리가 일상에서 '소비'하는 것들 속에 담긴 본래의 모습을 얼마나 자주 떠올리시나요?
만약 여러분이 이 연필로 무언가를 그린다면, 그것은 숲을 되살리는 일일까요, 아니면 숲을 계속 깎아내는 일일까요?
어쩌면 이 그림책이 전하는 가장 아름다운 메시지는, 소멸 속에서도 창조가 가능하다는 희망인지도 모릅니다. 깎인 연필이 만들어낸 숲처럼, 우리의 창작이 새로운 생명력이 될 수 있다면 말이죠.
다음에 연필을 손에 쥘 때, 잠시 멈춰 그 무게를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단지 연필의 무게가 아니라, 한 그루 나무의, 한 조각 숲의 시간을 품은 무게일 테니까요.
조용한 해설자의 그림책 해설 다음 이야기에서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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