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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의마음 Nov 27. 2024

눈 내린 날, 마음이 폭신 말랑해졌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박용래 <저녁눈>


단톡방에 한 친구가 동영상을 올렸다. 

새벽녘인지 눈보라가 몰아치는데, 눈발이 푸릇푸릇 살아 날뛰고 있었다. 

춤이라고 하기엔 그 리듬감이 너무나 과격했다. 

그 새벽 눈보라를 헤치고 친구는 일을 하러 갔구나...  

아침 거실 창으로 본 눈은 폭신한 마쉬말로 같았는데, 이런 속사정이 있었군!  

친구의 수고러움을 바라보며 어떤 시가 떠올랐다.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고,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고,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고, 또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고. 

눈이 참 분주히 할 일도 많다. 


나도 참. 복잡한 출근길을 바라보며 시를 떠올리다니. 나의 백그라운드는 어찌 할 수 없구나!


 


많은 이들이 자기들만의 붐빔으로 하루를 꾸려나갈 때, 나는...

거실창으로 월요일 가을 단풍과는 너무나 다른 겨울을 보며 빨래를 갰다.

그리곤 부엌창 너머 벚꽃을 닮은 눈꽃송이를 곁눈질하며 설거지를 했다.ㅋㅋ  


오랫동안 시도했던 일에서 미끄러졌고, 왜 나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을까 하며 한동안 슬퍼했다.

하지만 별일 없다는 듯 살아서 이렇게 아름답고 평온한 일상을 지속할 수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인생이, 성공이 뭐 별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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