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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의마음 Dec 19. 2024

과속문명시대에도 누룽지는 맛있다

드라마 <개소리>를 볼 때였다. 노인들이 햄버거 집에 갔는데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못해서 먹기를 포기하고 집에 가서 맛있는 누룽지를 먹자고 하는 장면이 나왔다. 가게를 찾아온 초등학생에게 키오스크 이용법을 배워 결국은 햄버거를 맛나게 먹지만 그 초등학생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신문명에 밀려버린 자기 세대를 불쌍히 여기며 줄곧 '누룽지 최고!'를 외쳤야 했을 것이다. 이 장면을 웃으면서 보긴 했지만 몇 해 전이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키오스크에서 처음 주문했던 날이 떠올랐다.  


오래전, 도서관 모임을 끝내고 친구들과 얘기나 하자며 프랜차이즈 카페로 들어갔을 때였다. 입구에 들어서자 오랜만에 와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최근에 뭔가 바뀐 것인지 낯선 기운이 확 몰려왔다. 1층에 음식을 찾는 곳은 있는데 주문받는 곳이 없었다. 커다란 화면이 달린 기계가 두 대 떡하니 놓여 있고 그 뒤로는 일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한 직원이 나오길래 주문하려 했더니 주문은 기계에서만 할 수 있다며 지나가 버렸다. 기계라고? 난 기계랑 안 친한데. 무인시스템이 완전히 정착된 것 같았다.

     

한 친구가 자리를 잡으러 2층으로 올라갔고, 다른 친구와 나는 간식을 주문하려고 키오스크 앞에 섰다. 화면이 켜져 있다는 것 외에 주어진 정보는 없었다. "내가 할게. 이거 해봤어." 친구가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목소리가 참으로 명랑했다. 그 동네에 사는 친구는 날마다 몇 시간씩 산책한다더니 벌써 와본 모양이었다. 그런데 친구는 호기롭게 커피 버튼을 누른 후 다른 메뉴는 먹어본 적 없다면서 메뉴판을 헤매고 있었다. 잠깐은 멈출 수도 헤맬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 시간이 너무 길었다는 것. 우리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학생 때부터 수도 없이 와본 이 프랜차이즈에서 주문하는 데 이렇게 진땀을 빼다니. 겪어본 적도 미래에 겪을 것이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외국에서 살았던 나는 검은 머리든 노란 머리든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을 섞을 수 있고, 박사학위 소지자인 내 친구는 대학 강의 경력만 십수 년이다. 하지만 이 주문 기계 앞에서 우리의 지적(知的) 역사는 허망한 넋두리에 불과했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손부채질을 하다 처음부터 다시 하자며 키오스크 화면을 초기화했다. 옆 기계에서는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고등학생 아이가 뚝딱 주문을 끝냈다. 찬찬히 메뉴를 누르고 무슨 포인트 적립 어쩌고 하는 말은 몰라서 그냥 무시하고 오로지 결제 버튼만 찾았다. 똑같은 음식을, 우리는 남들과 다른 가격으로 샀을지도 몰랐다. 카드를 밀어 넣자 영수증이 나왔다. 휴! 

      

주문한 간식을 챙겨 친구가 잡아놓은 2층 자리로 올라갔다. 자리는 아직 무인시스템으로 도입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신문명의 세계에서 땀을 삐질 흘리며 쟁취해 온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20세기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커피와 애플파이와 스프라이트가 놓여 있었다. 단지 그것을 먹기 위한 수고가 달라졌을 뿐.      


키오스크도 이제는 익숙한 것이 되었지만, 그날은 마른 땀을 흘렸고 이후에도 기계에 따라 메뉴 배치도 카드 투입구 위치도 달랐으니 한동안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누가 뒤에 줄이라도 서면 민폐가 되지 않도록 온갖 지적 능력을 동원해 서둘렀다. 그럴 때면 나도 이 정도인데 나보다 더 나이 든 사람은 어떨지 새 문명에 당황할 누군가를 안쓰러워했다. 왜 매번 생각할 것이 늘어만 가는지 이게 과학이 가져다준 편리함이냐고 툴툴거리기도 했다. 새것이 나왔냐고, 당황하지 말고 억울해하지 말고 배우면 되는 일었지만 그런 마음을 먹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저항감은 아마도 피로감에서 온 것 같았다. 배우는 일은 즐겁다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귀찮고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키오스크뿐 아니라 핸드폰, 앱, 은행 등등 실생활 곳곳에서 모르는 것과 배워야 할 것이 늘어나다 보면 피곤해진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것, 모르는 것이라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도 아니고 뭔가. 그리고 더 큰 이유는 시대에 밀렸다는 상실감인 듯하다. 열심히 살아왔고 또 배우고 있지만 나날이 바보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란 당황스럽고 서글프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됐다는 기쁨은 배움에 대한 도전과 실천이 선행되어야 할 테고, 그전 단계까지는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예전에는 세월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 지혜가 는다고 했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경험으로 알게 되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챗gpt에게 물어서 해결하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는 시대다. 사고로 무인도에 떨어지게 된다면 경험으로 얻은 지혜가 빛을 발휘하게 될까.


키오스크, 핸드폰, 앱, 챗gpt, AI 활용 등등 친구들과 종종 요즘의 문명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너무 많이 발전했다고, 무서울 만큼 빨리 변해간다며 2000년대 초, 핸드폰으로 문자를 하고 이메일을 보내던 시절이 편했다는 이들도 있다. 기계에 치이지도 않고 초조하게 따라가지 않아도 되고 또 없어도 살 만했던 시대라는 이유였다. 돌이켜 보면, 그때에도 할 일은 다했고 재미있는 일도 많았으니 나 역시 그 생각에 동의한다. 앞서 말한 드라마와 관련해 개인적인 입맛을 덧붙여 보자면, 나는 느끼한 고기 패티에 소스 범벅인 햄버거보다 살짝 튀겨내 가볍게 설탕을 뿌린 누룽지 쪽이 훨씬 맛있는 사람이다. 


몇 달 후, 아니 며칠 후 또 어떤 신문명이 등장할까. 더 이상은 사양하고 싶은데, 이런 마음야말로 부적응과 노화를 증명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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