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반달이 도드라지는 시각, 동네 산책을 하다가 난생처음 너구리를 만났다. 서너 걸음이면 닿을 거리에 있는 너구리. 아파트 뒤쪽에 있는 산에서 내려온 것 같았다. 어둠 속에 숨겨진 작은 빛들을 끌어모은 듯 반짝이는 검은 눈은 깊었고 순박해 보였다.
‘너구리’와 관련한 기억이 있다. 한국에서 흔히 사용되는 여우, 호랑이 같은 동물 별명에 대해 수업하던 중이었다.(나는 전직 한국어선생이다.) 불여우, 여시, 호랑이선생님 등등 한국에서만 사용되는 의미들을 말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다니엘 씨가 기무라 씨에게 “너구리~”라고 말했다. 기무라 씨의 얼굴이 둥글넓적하고 눈가가 어둡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잠깐 멈칫하다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모두들 웃으며 서로에게 동물 별명을 붙여주자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너구리'라면 민담에서 나오는 것은 본 적이 없었고 통통한 라면이나 롯데월드의 캐릭터 정도라고 간단히 설명을 덧붙였고, 학기가 끝날 때까지 기무라 씨는 기꺼이 너구리가 되어 주었다.
몇 해 후 일본에서 살 때였다. 우리나라에 비해 너구리는 그들에게는 익숙한 동물이었다. 아이들 프로그램과 동화책에서 특히 많이 등장했다. 이자카야(居酒屋, 술집)를 장식하는 배불뚝이 술꾼 너구리 인형, 여우에게 당하는 동화 속 바보 너구리, ‘뿅~’ 하고 사람으로 둔갑하는 요괴 너구리 등등. 그 모습이 다양했는데, 대부분 멍청하고 웃겼고 귀여웠다. 뿐만 아니라 유명한 전래동화『카치카치산(カチカチ山)』에 등장하는 아주 기막힌 너구리는 상상 이상의 너구리를 보여 주었다. 내게는 상당히 쇼킹했기에 그 내용을 잠깐 소개해 본다.
옛날 어느 산골에 노부부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농작물을 파헤치던 너구리를 잡아 창고에 가두는데, 할머니가 너구리가 잘못했다고 빌자 풀어준다. 너구리는 할머니를 죽이고 할머니로 둔갑해서는 너구리국(실은 할머니 고기를 넣은)을 끓여 할아버지에게 먹인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할아버지는 친구 토끼에게 한탄을 하고, 꽤 많은 토끼는 너구리에게 복수하기로 한다. 진흙배를 타고 강에 나가면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다고 너구리를 꼬시고, 너구리는 철석같이 믿고 실행했다가 진흙이 녹는 바람에 강에 빠져 죽는다.
이를 과연 아이에게 읽어줄 수 있을까. 권선징악적 결말이지만 그래도 소름이 끼쳤다. 살인을 하고 남에게 인육을 먹이는 너구리라니. 원래 민담이나 전설에는 잔혹한 내용들이 꽤 있지만(사람 사는 세상 이야기니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이것은 지나쳤다. 동글한 외모의 귀여운 인상이 강조되는 요즘 창작물과는 달리, 전통적으로 보자면 ‘너구리’는 잔인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한 부류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국어 수업에서 너구리란 말을 들었던 기무라 씨는 한국특파원으로 서울에 머물던 기자였으니 이런 전래동화를 모를 리 없었다. 한참 뒤늦게, 그가 스스럼없이 웃어준 것이 새삼 고마웠다. 생각난 김에 그의 이름을 검색해 봤다. 일본 어느 남쪽 지역의 정치가가 되어 있었다.
동물원에 가지 않는 이상, 살면서 동물에 관심을 가질 기회는 별로 없었다. 산 가까이 이사와 너구리를 본 덕에 우연히 생각의 물꼬가 터졌고, 덩달아 한국에서의 너구리 이미지가 궁금해졌다. 백과사전을 검색했더니 ‘너구리는 개과에 속한 아시아에 서식하는 포유동물로 몸길이는 50~70cm, 나무 열매, 생선, 쥐 등을 다 먹는 잡식성 동물이다.’라는 기본 설명이 나왔다. 그리고 ‘음흉하고 능청스러워 총소리만 나면 놀라 죽은 시늉을 하기도 한다.’ 라거나 ‘둔해 보이는 외모 때문에 의뭉스럽고 미련한 가장 지능 낮은 동물로 등장한다.’는 부연 설명이 있었다.(각각 『학습그림백과』와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을 출처로 함.)
이 설명을 과연 믿어야 하나. 총소리가 나면 사람이든 짐승이든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러면 기절도 할 수 있을 텐데 ‘의도적인’ 죽은 시늉이라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능이 낮은 동물이라는 평가는 수정되어야 할 것 같았다. 산책길에 본 너구리의 그 깊고 검은 눈은 순박해 보이기만 했는데 어쩌자고 이런 내용만 있는 것인지. 한국이든 일본이든 너구리는 멍청하고 나쁘다는, 누가 정했는지 모를 전제가 있는 듯했다.
물론 너구리는 산에서 내려와 농작물을 해치니 나쁘다. 하지만 그도 먹고살아야 하니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라고 아량을 베풀면 안 될까.(농사짓는 입장이라면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둔하고 멍청하고 음흉하고 잔인한 이미지는 너구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안타깝다. 혹시 너구리를 잡아다 고기는 먹고 털은 팔려고 했는데 실패했다거나 사냥 도중 크게 물렸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앙심을 품고 만들어낸 뒷담화는 아닐까. 말하자면 자신의 이익을 배반한 자에 대한 음모론이다. 상상력을 더해 보자면, 별다른 이야깃거리가 없던 시절 그들은 자기 맘에 안 드는 너구리를 씹어가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이 발 없는 말이 천 리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퍼져나가며 이미지로 고착된 것일 테다. ‘카더라 통신’이 진실인 양 뿌리내리는 경우처럼 말이다.
한국어 선생을 하던 시절,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수업은 즐거웠고 학생들의 평가도 좋았다. 외국인용 한국어다 보니 새로웠고 학생들의 생각도 한국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볼 수 없는 점들이 있었다.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자기 나라 말로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궁금해져서, 그리고 학교에서 잘리지 않고 오래 버티려고 영어와 일본어도 배웠다. 이런 속사정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소통하려면 외국어 능력이 필수라며 윗분들은 나를 칭찬하셨다. 하지만 실력과 칭찬이 늘어갈수록 나는 강사들 사이에서 욕먹는 존재가 되었고 심지어 어느 교수의 낙하산이라는 말도 돌았다. 현생(現生)과 무관한 너구리에 관심을 둔 것은 어쩌면 나의 이런 전력(前歷)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억울함을 나는 안다.
가엾은 너구리의 명예회복을 위해 멋진 너구리 왕자와 공주가 나오는 창작동화를 한 편 써볼까. 음, 왕자 공주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감이 있어 호응을 얻기엔 미약하다. 예전에 유행했던 다마고치나 닌텐독스처럼 너구리를 애완용 동물로 삼아 키우는 게임을 만들어 볼까. 현실성 있는 발상 같지만 난 기술적 능력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한때 너구리란 별명을 가졌던 기무라 씨가 좋은 정치인이 되어서 너구리에 대한 편견을 씻어주기를 빌어볼까. 권모술수가 기본인 정치판에서 좋은 정치인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리라.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한번 일그러진 이미지는 그것이 사실이건 거짓이건 하루아침에 바꿀 방도를 찾기가 어렵다. 사회에서 왜곡을 당한 채 살아가는 이들, 여기저기 너구리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