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스트의 식탁

by 그날의마음

LA에 사는 S가 단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전복, 새우, 밤, 대추를 넣은 그 먹음직스러운 본격 솥밥이란! 나라면 몇 날 며칠을 걸려도 해내지 못할 대작이었다. 역시 S는 대단했다. 이렇게 감탄하는 사이,

“네가 올려준 레시피대로 했어. 가족들이 좋아했어. 고마워~”

내게 이런 인사를 하는데, 도대체 뭐지? 전복이나 밤 껍데기를 까준 것도 아니고 나는 그저 얼마 전, 간단 솥밥 레시피를 카톡에 올린 일밖에 없는데.


나의 레시피란 냉장고 파먹기를 실행하기 위한 것으로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힘들이지 않으면서도 그럴듯하게 잘 먹자는 것, 또 하나는 냉장고 속에서 뒹굴 굴러다니는 재료들에게 존재감을 부여하자는 것이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되는 대로 있는 대로 섞어 솥밥’ 정도일까. 그런데 S는 전복껍데기를 닦고 새우 껍질을 벗기고 밤을 까며 그렇게 재료 준비에만 2시간쯤 걸렸단다. 가족을 위해 좋은 것을 먹이고 싶은 게 엄마 마음이라지만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소중한 손가락으로 그런 수고를 하다니. 참고로, S는 피아니스트다. 음악도 잘하고 음식도 잘하고 정말 능력자다.


친구의 솥밥을 보다가 밴쿠버에서 살던 날들이 떠올랐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는 한동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급자족 생활을 고수했었다. 동네 슈퍼에 가도 글씨도 포장도 다 처음 보는 것들이라 고기, 시금치, 사과 이런 것만 살 수밖에 없었고, 외식을 해도 어찌나 짜고 달던지 매일 그런 것을 먹으면 일찍 세상을 하직할 것 같았다. 결혼 전 서울에서의 나는 요리력 제로에 왜 삼식(三食)을 해야 하냐고 투덜대던 인간이었으나 그곳에서는 하루 세끼를 꼬박 그것도 아주 열심히 챙겼다. 외국이고 또 아이가 어리다 보니 건강에 좋은 것을 먹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잘한 한국 반찬은 물론 만두도 빚고, 떡도 찌고, 아이와 함께 쿠키와 빵도 만들었다. (아이와의 작업은 그때도 즐거웠고, 돌이켜보니 더 그리운 추억이다.^^) 좋은 중국 레스토랑들을 알게 된 후로는 외식도 종종 했지만 그래도 내 인생 중 음식에 가장 정성과 시간을 쏟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국적을 불문하고 내가 만난 엄마들은 유행처럼 신념처럼 가정식 수제요리를 지향했었다. 상하이에서 부동산 업자였던 루이즈는 전업주부가 되어 음식을 해보니 그동안 먹었던 식당 음식이 얼마나 화학첨가물 범벅이었는지 알게 됐다며 집밥만 고집했고, 아이의 발레 클래스에서 만난 인도 출신 제니퍼는 무가당 시판주스를 손에 들고 있던 내게 과당도 설탕만큼이나 해롭다며, 자기는 날마다 신선한 과일을 직접 갈아 먹인다고 했다. 필리핀에서 온 램린 역시 다진 고기와 여러 종류의 버섯을 넣고 스파게티 소스를 만들었는데 확실히 부드러운 맛이 좋았다.


그러다가, 한국에 돌아와 오래 살다 보니 생각이 좀 달라졌다. 아이도 많이 컸고, 그간 음식을 준비하고 먹고 치우는 데 시간을 너무 쓴 것 같아서다. 젊을 때에는 오늘을 다 써버려도 내일이 또 올 테니 불안하지 않았다. 5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내 몫의 시간이 보장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샌가 더 이상 젊지 않게 됐고, 큰 병에 잔병에 나날이 골골 정도가 심해지다 보니 삶의 유한성을 뼈저리게 느낀다. 내 시간의 다섯만 투자해도 충분히 먹고살았을 것을 공연히 열을 다 써버린다면 먼 후일 후회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한국에는 나보다 솜씨 좋은 반찬 가게가 얼마든지 있다.


날이 흐릿하니 몸도 기분도 찌뿌둥하다. 관절도 좀 쑤시고 가벼운 두통도 있는 듯하다. 냉동실에서 양념 쇠고기와 요리하고 남은 버섯들을 꺼냈다. 럭셔리 솥밥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할 간단한 식탁이 되겠지만, 나는 그만큼 나의 시간과 노력을 다른 데 사용할 수 있다. 쉰다거나 논다거나 책을 읽는다거나 글을 쓴다거나. (노동도 없고 돈도 벌지 않으니 다 노는 일일까.)


음식의 만족도는 떨어질 수 있지만 다른 좋은 점을 고려한다면 만족도의 합계는 비슷할 테다. 못 먹고사는 시대도 아니고, 그리고 밥과 고기와 야채라면 영양상 아무 문제도 없다. 물건을 비우며 편리와 기쁨을 얻는다는 미니멀리스트처럼 맘 편히 몸 편히,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간단한 식탁을 차려본다. 대신 여유로운 마음과 웃음을 반찬으로 곁들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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