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부산까지 얼마나 걸려? 낮에 가고 밤에 올 수 있어?”
“당근이지. 기차가 있잖아.”
“그럼 밤 11시 넘어서 출발하는 기차도 있어?”
“응? 글쎄. 근데 왜?”
“나 부산 갔다가 밤 12시 넘어서 와도 돼?”
아이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이유 콘서트 티켓팅을 처음으로 했고 운 좋게 좋은 자리를 얻었는데, 글쎄 평일 공연에다 그 장소가 부산이란다. 학교를 빠지지 않고도 공연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연구 중인 것 같았지만 그것은 어불성설, 우리 집은 서울이다.
“그냥 결석해. 금, 토, 일. 가족여행이야!”
아이의 마음을 읽은 나는 흔쾌히 말했다. 아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전의 나였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갑작스레 엄청 커졌다거나 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무시하게 되었다거나 하는 이유는 결코 아니었다. 그저 아이의 팬심을 헤아리게 되었다고나 할까.
드라마《열혈사제》를 봤다. 전직 국정원 요원인 김해일(김남길 분) 신부와 구형사가 공조해 비리를 파헤치는 내용인데, 진지함과 코믹이 적절히 혼합된 것이 흥미진진했다. 특히 김남길을 보면서 난생처음 ‘팬심’이란 걸 알게 되었고, 그의 과거 작품을 일일이 찾아보면서 가수 콘서트를 쫒아다니는 열혈팬들도 이런 마음이겠구나 싶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예전에 내가 빠져들었던 것은 책 <키다리 아저씨>, 윤동주, 박완서, 바하, 라흐마니노프. 플륫, 바이올린 정도다.)
덕분에 아이는 입도 떼기 전에 소원 성취를 한 것이었다. 가족여행을 결정한 그 순간부터 아이는 행복을 맛보기 시작했다. 드디어 여행 첫날, 콘서트를 관람했는데 심지어 일찍 간 덕분에 아이유가 출근(공연장에 도착하는 것)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단다. 아이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신나 했다. 둘째 날에는 광안리에서 헤이즈의 버스킹도 보았는데 그곳에 가면서 아이가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엄마, 나 이렇게 행운을 다 써도 돼. 무서워. 앞으로 평생 쓸 행운까지 다 쓴 건 아니겠지?”
아이는 이런 생각을 할 만큼 행복했던 것일까.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니!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행복해졌다. 아이는 광안리 바닷가 모래 위에서, 남편과 나는 2층 커피숍에 앉아 공연을 지켜보았다. 노래도 노래지만 행복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뭔가를 좋아하고 행복을 느끼는 일. 그런 순간들이 모여 힘든 시간도 이겨내고 그렇게 행복한 인생이 이뤄지는 것 같았다.
남편 또한 내 팬심의 수혜자가 되었는데, 운전하면서 내 잔소리 없이 걸그룹 노래를 맘 편히 들을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나는 시끄러운 노래는 딱 질색이지만 역지사지 그 팬심을 이해하니 참을 수밖에. 옆자리에서 입다물고 조용히 있었다. 나도 김남길 드라마를 거짓말 좀 보내 백번쯤 봤으니 남편도 트와이스나 블랙핑크 노래를 백 번쯤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매번 회사와 집만 오가는 생활이니 그 정도의 숨구멍은 필요하다.
뭐든 보는 이의 입장에 의해 그 해석이 달라진다고, 만약 내가 팬심을 몰랐다면 어땠을까. 학생이 왜 부산까지 콘서트를 보러 가냐고, 아저씨가 무슨 걸그룹이냐며 짜증을 냈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 심정을 이해한다고 해도 기막힐 때도 있긴 하다. 아이가 코앞에 닥친 시험보다 콘서트 티켓팅 걱정을 하고, 남편이 매번 걸그룹 기사를 읊어대면 ‘그만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기는 하지만 꿀꺽, 삼킨다.
그와 동시에 차분하게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린다. 사랑에 눈이 먼 이들을 심하게 뜯어말렸더니 허무하게 죽어버리지 않았나. 반대하지 않고 내버려 뒀다면 사랑이 금세 식어버렸을지도 몰랐을 텐데 말이다. 말리면 더 불타오르는 게 사랑이라고 팬심도 일종의 사랑일 터, 공연히 아이와 남편의 팬심을 건드려 봤자 '긁어 부스럼'일 것이다. 자살골은 삼가자. 그들의 팬심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나도 맞불작전처럼 김남길 드라마 보기를 무한반복한다.
쓸데없이 아이와 남편의 팬심을 참견하지 않으면서 내 세계에 칩거하는 것. 이 소소한 지혜가 우리 집을 분쟁에서 구원해 평화의 세계로 인도하리라. 실제로 우리 가족은 부산여행을 하면서 사이가 더 좋아졌다.^^ 중고딩 시절에도 몰랐던 팬심의 덕을 이제 와서 보다니 살다살다 참 별일이다.
(몇 해 전, 우리 아이가 행복으로 반짝이던 11월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