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마 시절이었다. 밥을 먹고 벽에 슬쩍 기댔다. 나른했던 나는 그대로 미끄러져 누워 버렸다. 가슴이 콩닥콩닥, 두려웠다. 혹시 인형극에서처럼 소가 되면 어쩌나.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손등에선 누런 털이 돋아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동화책도 어른들도 밥 먹고 빈둥대며 드러누우면 소가 된다는 얘기를 곧잘 했었는데, 거짓이었을까. 의문이 생겨났다. 그러나 잠시였다. 줄곧 반복되는 ‘사람이 부지런해야지. 게으름 피우면 벌 받는다’는 말들은 딴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좀 더 자라서 미국 선교사가세운, 백 년도 넘은 학교에 다녔다. 청교도적 믿음을 강조했던, 예배 없는 날이 없던 그 미션스쿨에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다는 신의 사랑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놓고 사용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라고도 배웠다. 별다른 비판 없이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나는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착하고 성실한 학생이었으니까. 과연 진실일까 거짓일까 혹은 많은 이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거짓에 불과한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중년이나 되어서였다.
그저 순박하게, 받은 달란트를 부지런히 잘 사용하는 그래서 톡톡히 밥값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꼭 그래야 하는 줄 그렇게 살아야만 제대로 사는 건 줄 알았다. 그렇게 살려면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됐다. 그래서였을까. 공부나 일을 별로 안 했을 때에는 죄지은 기분이었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을 때는 벌칙처럼 식사를 건너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완전 자학이었다. 전혀 놀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만, 노는 순간에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남들은 다 앞으로 가는데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했다. 열심을 다해 성공해야 한다는 사회적 신념과 달란트의 열매를 맺으라는 종교적 요구를 적당히 받아들였다면 좋았을 것을, 나는 지나치게 고지식했다.
더 이상 어리지도 젊지도 않게 된 어느 날, 옛 친구를 만났다. 큰 병치레를 했으니 그만큼 더 잘 먹어야 한다며 친구는 나를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따스한 조명과 흑백색의 인테리어가 조화를 이룬 세련된 곳이었다. 친구는 언제든 멋을 챙길 줄 아는, 그저 비빔밥을 내놓아도 색색 고운 야채와 고기꾸미를 눈으로 먹는 프랑스 요리처럼 플레이팅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학생 때도 결혼 후에도 그랬다. 긴 칩거 후 시작된 친구의 직장생활과 예기치 못했던 나의 병인생활 등 일상사를 나누는 사이, 음식이 나왔다.
“이 집 스테이크 기름기도 별로 없고 되게 부드러워. 소스도 풍미가 있고. 우리 나이엔 잘 챙겨 먹어야지. 게다가 너는 수술도 했잖니. 구운 아스파라거스도 맛있더라. 당근도 살짝 레몬 맛이 배어있어. 많이 먹어야지. 먹는 게 힘이야. 너는 옛날부터 안 먹어서 탈이었지.”
“꼭 엄마처럼 말하네. 대강 먹어도 괜찮아. 직장을 나가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뭐.”
“아이 챙기고 집안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래. 회사 다녀보니까 알겠더라. 나도 그러고 살 땐 별거 아니라면서 식사도 대충 때웠는데 지금 보니 가사노동이란 표 안 나는 중노동이더라고. 회사가 훨씬 더 편해. 그리고 일을 안 해도 먹어야지. 심장이 뛰고 근육이 움직이잖아. 자는 동안에도 에너지가 쓰이는 건 알지? 기초대사량!”
기초대사량?!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그 말이 아직 잔상처럼 남아있던 시절이라 친구가 던진 그 한 마디는 파장이 컸다.
병에 걸리기 전, 한참 구직활동 중이었다. 외국에서 십여 년을 살다 돌아와 보니 한국에 내 자리는 없었다. 공부도 일도 비교적 잘했던 과거를 가진 나였지만 그저 경단녀에 불과했다. 사회에서 완전히 뒤처진 내 처지를 기막혀하던 중 병을 앓게 되었고, 그러니 의기소침의 연속이었다. 직장에 있든 한가하든 바쁘든, 숨이 붙어 있는 모든 생명체는 다 먹어야 한다는데, 노동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든 먹을 자격이 있다는데, 자신에 대해 나는 왜 그리 인색했을까.
일하지 않는 자 어쩌고 하면서 남한테 먹어라 말아라 하는, 오래된 체기 같던 그 말은 무지와 독선에서 비롯됐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더 열심히, 뭔가 내세울 것 있는 삶, 가치 있다고 평가되는 삶을 살아야만 먹을 자격이 있단 생각은 던져버려도 좋았다. 주눅 들었던 어깨가 살짝 가벼워졌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였다. 버틀란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책을 발견했다. 게으름을 찬양하다니? 흥미로운 제목에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신세계였다. 이 책에서 러셀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정당하게 착취하기 위해 종교와 결탁해 ‘노동이 최고’라는 가치를 사회에 주입했고, 그 결과 대다수가 노동에 몰두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원래 ‘게으름’이란 인간이 그리도 바라던 여가이자 또한 문화와 예술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었는데, 사회적 동의하에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충분히 일리가 있었고 그래서, 억울해졌다.
게으름을 경계하면서 열심히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며 자책하던 때가 많았다. 발을 동동거리며 뭘 바라는지도 모른 채 달려가던 내가 보였다. 모자란 부분을 들추며 그렇게 빡빡하게 굴 필요는 없었는데. 사회의 요구에 세뇌당해 열심과 성공을 최상의 가치라 믿었던 것도 쓸데없었다. 당장 먹을 것이 없다면 일을 해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적당히 빈둥대며 좀 게을러도 괜찮았다. 별로 이룬 것도 없이 공연히 마음만 불안했던, 순진하고 순박했던 나의 지난 시절이 야속해졌다. 어느덧 열심과 치열함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는 버겁고, 또한 그것이 대단치도 않음을 알게 된 나이. 이제부터라도 나의 게으름, 아니 느긋한 마음과 건강한 여유를 즐겨보기로 한다.
<좋은수필> 2021년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