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윗집 아이의 울음소리와 쿵쾅대는 발소리에 잠을 깬 나는 비몽사몽. 언제쯤 꿀잠 자고 내 의지대로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냉장고에 밥과 몇 가지 반찬이 있지만 영 먹기는 싫었다. 새로 산 그린라벨 우유를 꺼냈다. 언제부터인가 마치 루틴처럼 커피우유를 마신다. 끓인 물에 디카페인 커피가루를 넣고 그 위에 우유만 부어주면 하루를 시작하는 맛있는 음료가 탄생한다. 하지만 오늘은 날도 더워졌으니 물 끓이기는 생략하고, 그냥 우유에 커피다. 숟가락을 꺼내기도 귀찮아서 커피병째 들어 살짝 털어 넣자 했는데.
어머나? 커피색이 왜 이렇지? 왜 하나도 안 녹지? 어멋!
뭐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머릿속이 아우성쳤다. 그 커피가루는 색도 좀 흐릿한 것이 차가운 우유 위에서 전혀 녹을 생각을 안 했다. 부랴부랴 안경을 쓰고 보니 그 정체는 깨. 가. 루. 참깨의 고소한 냄새가 좀 나는 것도 같았다. 당황스러웠지만 또 재미있기도 했다. 깻가루를 사용하기 좋으라고 작은 페트병에 넣어두었더니 옆에 있던 멀쩡한 커피병과 헛갈린 것이었다. 작년쯤이었나, 한동안 리필용 커피 사서 작은 페트병에 담아둔 적이 있었는데 잠시 머리가 그 시절로 돌아갔었나 보다.
오늘따라 왜 우유는 이리 가득 따랐을까. 우유를 버릴 수도 없고. 또 깨는 어쩔까. 그때 남편이 가끔 검은깨 두유를 마시던 게 생각났다. 두유에 검은깨를 넣으면 몸에 좋은 검은깨두유, 우유에 깨를 넣으면 몸에 좋은 참깨우유. 일종의 블랜딩이라고 생각하면 깻가루는 전혀 문제 될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검은깨두유에 도전장을 내밀 만한 참깨우유를 창조해 낸 것인가. 오! 이건 거의 천재급인 걸.
이미 우유 위에 뿌려진 깨를 다시 꺼낼 수도 없으니 작은 스푼으로 건져먹기로 했다. 빠삭하지 않은, 우유에 살짝 불어버린 깻가루의 맛이란, 그럭저럭.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는 우유 위에 다시 커피가루를 부었다. 조금 흔들자 커피가루가 금세 휘리릭 녹아 풀렸다. 깻가루라는 갑작스러운 역경을 딛고 우뚝 선 나의 커피우유! 그렇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커피우유가 완성되었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왜 깻가루를 우유에 넣어버린 것일까. 좀처럼 하지 않는 실수였다. 원인은 윗집 층간소음, 그리고 멍청해져 가는 뇌, 아니면 요즘 머리를 몽롱하게 만들 만한 피로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원인 모를 해프닝일까. 이미 일어난 일을 놓고 원인은 생각해서 뭐 하리. 간단히 수습했고 제대로 커피우유도 마셨으니 그만이다. 세상에는 골똘히 생각해야 할 일도 있지만 단순히 넘겨야 할 일도 있다. 공연히 머리를 피곤케 하는 일은 삼가자.
실수를 반기는 이는 없을 테지만 살면서 실수를 안 하는 이는 없다. 실수에 대해 이게 뭐지 하며 기분이 별로일 수도 혹은 재미있을 수도 있고, 그 결과물을 놓고도 실패 혹은 새로운 창조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심각한 경우에는 실수라는 단어 대신 '잘못'이라고 할 테니 실수는 심각성과는 거리가 멀 테다.) 같은 행동과 같은 결과물이라고 해도 그것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은 천지차인 것이다. 실수는 나의 선택이 아니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오늘 아침에는 다른 날과는 달리, 커피우유뿐 아니라 고소한 단백질까지 한 번에 섭취할 수 있었다. 칼슘과 단백질의 만남이라니 갱년기 여성에게 이보다 더 좋은 음식이 있으랴. 거기에다 엉뚱한 실수는 생각하지 못했던 웃음까지 주었으니, 이런 류의 실수는 가끔 할 만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