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을 살고도 베이징에 있는 내가 낯설다
오늘따라 저녁 하늘이 유난히 예뻤다.
집을 나설 땐 붉은 기운을 머금고 있었는데 차츰 오렌지빛이 되어 사라지고 시나브로 청명한 푸른빛이더니 결국엔 짙푸른 봄밤이 되는 아름다움을 딸아이와 함께 보았다.
하루종일 책상 앞에 앉아있던 아이를 걷게 할 요량으로 산책에 나선 거였는데, 다채로운 하늘색에 따라 부드럽게 풀어지며 짐짓 미소까지 내보이는 얼굴을 보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봄꽃들 사이를 함께 걷다가 목련 몇 그루 앞에 다다라서는 행복하다고 잠깐 생각했다. 사위가 어두워지는 시간에 보는 목련이 참 근사했고, 만개한 목련 아래에 서서 고개를 들어보니 밤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쏟아져내리는 것 같았다. 딸아이와 함께 한 뜻밖의 눈호강이었는데, 이럴 땐 정말이지 여기가 베이징인지 서울인지 모르겠다.
사계절의 닮은꼴 기후여서 이곳 베이징에서도 개나리와 목련이 제일 먼저 봄을 알린다. 그런데 개나리 짝꿍 진달래는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웬만한 봄꽃들은 다 있는데 왜 진달래는 없을까. 문득 내게 있어 서울과 베이징의 차이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일견 다 있는 것 같지만 분명 없는 게 있는.
서울이든 베이징이든 빌딩과 아파트로 채워진 도심의 모습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일하고 살림하고 아이들 케어하고 가끔 외식하고 지인들과 어울리고 나들이 가고.
오래 지내다 보니 여기가 어디인지 헛갈릴 정도로 낯익은 풍경들도 많다. 그런데도 아까 딸아이와 저녁 산책 끄트머리에 아파트 벤치에 앉아서 15층 우리집을 올려다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여기가 서울인가 베이징인가, 난 여기서 뭐하는 건가..’ 베이징 생활 14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일상의 순간순간 남의 나라에 살고 있는 내가 낯설어질 때가 있다. 가끔은 매일같이 오가는 길을 걷다가도 ‘여기가 지금 베이징이라고?’ 스스로에게 황당하게 되묻기도 한다. 남의 나라에 익숙해져 있는 내가 낯선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다 보면 슬그머니 비집고 들어오는 감정이 있다. 마음이 힘들 때는 외롭고, 내가 왜 여기 있나 싶을 때는 공허하고, 결국은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는 쓸쓸하고. 어디에 살든 일상의 모습은 비슷하지만 살아가는 마음은 다르다. 부모, 형제, 친구가 없는 타국에서는 흔들릴 때 아주 크게 출렁인다.
그런 마음은 대부분 상황이 안 좋을 때 오는데, 컨디션 난조로 하루종일 침대 신세일 때는 각자 바쁜 가족들에게 내심 서운해서 엄마가 보고 싶어진다. 남편과 크게 싸운 날에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집을 나와도 갈 데가 없다. 잠시 머뭇대다가.. 따뜻한 계절이면 동네 주변을 걸으며 꾹꾹 눌러 추스르고 추운 계절이면 아파트 비상계단에 쪼그려 앉아 얼마쯤 조용히 운다. 그리고 어쩌다 가슴속에 외로움이 비집고 들어올라치면 차가운 맥주를 벌컥벌컥 마신다. 마주해봐야 좋을 것 없는 감정은 얼른 씻어내야 하니까.
여기에서는 진짜 내 편이 필요한 순간 찾아갈 사람이 없고 달려와줄 사람도 없다는 것, 그것이 베이징에서의 내가 낯설어지는 이유가 아닐까.
.. 요즘은 서울이 정말 그립다.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간다고 생각하니 더 서글프다.
오늘따라 유난히 예뻤던 저녁 하늘은 우리 서울까지 이어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