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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의 예술가 육코치 Dec 08. 2018

나의 뜨락으로 간다 1

 리틀 포레스트


'배가 고파서 왔어 ᆢ정말이야'

허기진 배,굶주린 영혼의 혜원이 무심한 듯 그러나 입 안으로 꼭꼭 되씹듯 뱉은 말이다. 그 한 마디 대사만으로 영화는 그 소임을 다했다. '쿵'하고 내려앉은 마음에 서서히 꽃이 피고 별이 떠올랐다. 


3월의 어느 주말 심야에 숨어들 듯 구겨 앉은 한 영화관에서 '쉼'과 '안도'의 평온을 누렸다. 앵글은 소박한 시골 마을의 사계를 느린 눈으로 펼친다. 청춘들의 단기 내면 성장사가 자전거 바퀴에 굴려간다. 하이얀 눈 빛,노오란 빛,푸르디 푸른 성장 빛,낙엽 내음 번지는 빨간 빛,다시 조락의 하얀 빛.


혜원의 허기를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독을 긁는 마찰음만 가득, 1인분도 못 미치는 쌀. 혜원은 눈밭에 얼어있는 배추 밑동을 찾아내 언 손 불어가며 캐낸다. 모락모락 고향의 인정을 피어 올리는 배추 된장국밥. 화면이 생기를 띠며 꽁꽁 얼어있던 실내에 온도를 채운다. 혜원은 향수에 대한 갈증을 단숨에 씻어낸다. 정글 도시에서 품었던 독기와 긴장을 풀어 헤치며 단잠에 빠져든다.


그녀의 귀환을 반기는 재하는 일찌감치 귀향해 농사를 짓는다. 기업조직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 자복한 처지다. 군더더기 말도 필요 없이 새끼 백구 한 마리 건네며 씩 웃는다. 그 멋쩍은 웃음이 '네 맘 뭔지 알거든?!' 하는 듯하다. 비언어의 상징성이 갖는 신뢰감에 또 한 번 마음을 놓는다. 또 한 사람,친구들이 다 떠나는 고향마을을 지키던 은숙. 호시탐탐 도시로 튈 생각을 하지만 기껏 읍내 농협은행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재하를 향한 홀사랑이 그녀의 욕망을 잠재울 수 있을지 관전 포인트다.


더 이상 머물 곳이 아니라싶어 탈출을 감행했던 고향. 묻어야할 기억들 사이로 삐집고 나오는 '따듯한 영혼의 밥상' . 혜원은 엄마가 만들어주던 요리를 복기하며 기억을 캐낸다.


'쏭쏭쏭,탁탁탁ᆢ보글보글’


생기 넘치는 경쾌함은 언제나 요리를 하고 완성되어가는 그 순간이다. 귀로 먹고 눈으로 먹고 있다는 착각이 인다. 두릅,배추,푸성귀볶음,얼린 무조림의 주요 반찬뿐만이 아니다. 밤조림,고구마 말랭이,수유잼,쇠뜨기조림 등 이제는 고급스런 퓨전 한정식 집에서나 만남직한 음식들이 화면 가득 식욕을 자극한다. 청춘의 코드는 낫또 떡,양배추케익,누텔라,팥튀김 등 형형색색의 성찬을 차려낸다.


직접 빚은 막걸리까지 그들은 천국을 통째로 업어왔다. 마냥 행복에 겨워 배를 불리고 마음을 채우고 웃음을 회복하는데, 난 내내 눈가가 젖었다. '자연,요리,딸'로 자신의 '리틀 포레스트'를 만들고 간신히 버텨냈던 혜원의 엄마. 세상의 전부였던 혜원에게 엄마는 어느 날,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혜원에게 진정한 '독립'을 선물하고자 했던 것일까?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온전하게 자기 발로 선다는 건 이런 거였다. 모태를 잃은 혜원에게 고향은 더 이상 보금자리일 수 없었으리라. 독기를 품고 고향을 버렸던 혜원. 그런 그녀가 하얀 밤에 숨어들었다. 


일상을 회복하고 순간순간을 제대로 느끼고 숨 쉴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신과 만난다. 마루 한가운데 풀지 않은 채 꼿꼿이 서 있던 혜원의 배낭. 언제든 도시로의 탈출을 준비하고 있지만,겨울,봄,여름,가을을 지나도록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한다. 자신만의 '케렌시아'에서 영원히 둥지를 틀게 될지 감독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다만 이제 혜원은 시공을 초월한 케렌시아에 깃들어 있다는 걸 알 뿐.


린다가 돌아왔다. 몇 개월 이국 이곳저곳을 머물러 있던 그녀는 반드시 'Y표 밥상'이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김치,된장찌개만으로 충분하다ᆢᆢᆢᆢ고 떼를 썼다. 이름하여 7공주(공간의 주인) 모두가 귀국환영을 핑계로 양평 국수리 Y의 집에 깃들었다. 국수역 뒤 한 하우스 개발 단지 내에 이들 중 몇몇이 아주 작은 집을 지어 이웃으로 살기로 되어있었다. 먼저 둥지를 튼 Y의 집은 자연히 우리들이 숨어드는 다락방이자 아지트가 되었다. 지친 영혼들은 누구라도 무시로 드나들며 숨구멍을 틔운다. 오늘의 회동이 내겐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대한 오마쥬인 양 싶었다. 아무 준비없이 맞은 식객들을 위해 그녀는 '치륵치륵,쏭쏭쏭ᆢ' 분주히 칼질을 했다. 더러는 널부러진 채 조불조불 지껄이고 더러는 한 손 거드느라 분주히 씽크대 사이를 오갔다.


스파클링 와인의 달콤함에 굳어있던 주름이 펴졌다. 찹 스테이크 속 파프리카의 아삭함에 활기를 얻었다. 두툼한 계란말이로 입을 채웠다. 구수한 된장찌개로 속을 데웠다. 낙지속젓의 칼칼함이 기분 좋게 혀를 자극 한다.ᆢ 서두르지 않고 느린 말투로 저마다의 입맛을 세심히 살피는 그녀 덕에 지친 영혼이 녹아 내렸다. 간헐적으로 지나가는 철마의 단말마에 몸도 둥둥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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