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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의 예술가 육코치 Jul 21. 2021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


당혹스러웠다. 이런 감정이 올라오다니. ‘질투’, 확실하다. 이토록이나 순순한 책을 두고 이딴 이율배반적인 감정이라니. 어젯밤엔 기어이 눈물을 찍어냈다. 당황스럽다. 어떻게 이 대목에서?

그제 얌전하게 포장되어 온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를 받았다. 새벽 2시까지 동동거리며 일을 해치우고 몇 날 피곤에 절어서 자야 하는데 이 책을 펼치지 않고서는 잠 못 이룰 듯했다. 작가의 시, 작가의 칼럼을 읽어왔던 나는 찐팬으로서 ‘꼭 에세이집을 내주세요’라고 몇 번을 청했다. 나는 그의 글이 언제나 사무쳤다. 격한 감정을 쏟아내는 글이 아닌데 그의 글을 읽으면 언제나 사무치고 아리고 비리고, 절제된 슬픔이 그리움이 되어 버린. 보이지 않는 원형질에 자꾸 닿게 해서 칼날에 베인다. 그런데 그게 정화가 되는 야릇한 향수가 있었다.

너저분하고 지루하고 죽죽 늘어지는 나의 글과 무척 대조된다. 간명한 시어 같은 함축미. 누가 그랬다. 말이, 글이 길어지는 건 자신조차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몰라서라고. 부끄러움이 느껴지는 말이었는데 그의 책을 읽으면서 그런 부끄러움이 일었다. 문학적인 글쓰기의 정석을 보여주는 듯한 가지런함에 문장 문장마다 머물러 감탄했다. 동시에 절망감이 몰려왔다. 내가 절대 그가 될 수 없음을 진즉에 알고 있다. 그런데 그이고 싶을 만큼 부럽고 샘이 난다. 관조하듯 흘러가는 그의 삶이, 미풍에 묻혀온 그의 추억이, 소란하지 않으나 빛나는 창조성이. 몸으로 살아낸 언어가 이룬 결. 참 멋진 작품을 직조하고 있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아, 하필이면 김덕용 화백의 그림까지. 일고의 망설임 없이, ‘결’이 맞는 환상적 조합이구나 감탄했다. 과연, 자진하듯 치열히 살아낸 삶을 붙들어 준 것 중 하나가 김덕용 화백의 그림이었단다. ‘결’(2002) 작품 속 화자의 눈으로 망연히 세월을 견디고 사람을 견뎠단다. 자신을 투영한 듯한 그 그림으로 오랜간 꿈을 품었단다. 다음 시집이건 에세이건 저 그림을 모시겠다고. 그는 자신의 소박한 바램을 이루었다. 김덕용 화백의 작품을 사고 싶어서 딸막댔던 시간이 있어서 내게도 특별한 느낌이 있는 작품들이었는데. 그들은 글로 그림을 사고, 그림으로 글로 산 듯 ‘결’의 어울림을 즐겼을 듯하다.

“저 노란색이 말이야. 미친년 빤스 색깔 같더라고.” 화가 난 듯 일상을 박차고 파리 하늘을 누비는 아내 덕에 5살, 11살 개구쟁이 아들 둘, 앓아누운 노모 사이를 다니며 바라본 은행잎을 글 속 남편은 그렇게 표현했다. 다시는 당신 혼자 집 떠나게 하지 않을 거라며. 영화의 한 장면을 본 듯, 난 이 대목에서 울음이 터졌다.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이 대목에서. 왜? 난 솔직히 ‘남자’에게 연민을 갖지 않으려 작정한 사람이다. 그런데 싸르르 연민이 터졌다. 하필이면 11월의 이야기였다. 가장 좋아했던 11월이 가장 아픈 11월이 되어 버렸는데. ‘11월을 좋아하세요?’라니.





더럭 겁이 났다. 이 맑은 책이 나더러 순응하란다. 이제 얼음장을 깨고 마음을 헤쳐 놓으란다. 바야흐로 봄이란다. 쳐죽이도록 미운 그 넘들을 용서하란다. 어젯밤에 ZOOM으로 특강 하나를 했다. 나는 개선 용사가 된 양 생글생글 웃으면서 나의 크로노스의 시간을 얘기했다. 해맑게 앞으로 헤쳐갈 카이로스의 시간을 시전했다. 신파극을 펼치지 않았음에 대견해하면서. 그래 이렇게 단단해져가는 거라고. 흡족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무너졌다. 나는 그들을 절대 용서 안 한다고, 의식이 아무리 확장되고 참나가 원하는 일이 아님을 알아도 절대 열지 않으리라 뻗댔는데. 그들이 불쌍해졌다. 오죽 못났으면, 오죽 모자랐으면, 오죽 살고 싶었으면......그들도 나처럼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그들도 나처럼 삶이 두렵고 불안했다. 눈물과 함께 가슴이 자꾸 데워진다. 사르르 사르르 흘러내렸다.

자연이 주는 위로가 책 곳곳에서 꽃으로 피어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나고 들고 피고 진다. 기억을 헤집은 그곳엔 상처에도, 사랑이 흔적으로 남았다. 저 이는 저렇게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구나. 그래서 당당하고 꼿꼿하구나. 나도 지극한 사랑을 받았는데, 나는 받은 사랑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했던 건가? 왜곡되고 꼬인 만큼 저만치 멀리 달아나버렸네. 내가 환대하지 않은 사랑은 표류하고 있었던 거구나. 빛을 잃고 소리를 잃고 먼지로 떠돌고 있었구나. 

‘삶은 막막함이다. 막막함을 빼놓고 어찌 삶을, 사람을 이야기하랴.’ - 137쪽



살려고 보험을 해제하고 양평 산자락에 집을 지었다. ‘나무’ 한그루 살리자고 몇 차례 설계를 바꿔가면서 ‘기억’을 복원했다. 태초 가족이라는 원형질을 다시 만나서 나흘은 도시에서 사흘은 시골에서 지내면서 모든 것들과의 적정한 거리를 만들었다. 그의 집에서 맘 맞는 이들과 꼬슬한 밥을 먹고 향긋한 와인을 마시며 시낭송회를 한 적이 있었다. 자연의 조화를 잘 살린 집의 거실에서, 볕 잘 드는 그의 식탁에서 하얗게 웃었던 시간들이 있다. 비에 젖어 촉촉해진 회색 콘크리트의 질감도 기억한다. 도시에서보다 밥을 더 많이 했단다. 이곳에서 ‘자연’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그윽한 향수를 소환해줬다. 고라니가 친구하고 도토리 천둥도 스승이 되는 참살이. 본질 회복 에세이라는 의미가 적확하게 와 닿는다.

피었었고 피며 다시 피어날 사람이라는 꽃, 이곳은 볕이 잘 드는 맛집이다. 심장이 따땃해지는 영혼의 샘물 같은 책. 

‘햇살에 봄 들어 있다

빛 속에 숨은 생명의 씨

깊이 잠든 바위를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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