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마저 놓고 살았다. 다시 이어가는 책이야기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 그에 더해 책까지 놓고 살았다.
참 예쁜 발
- 고 두 현
우예 그리 똑 같노.
하모,닮았다 소리 많이 듣제.
바깥 추운데 옛날 생각나나.
여즉 새각시 같네 그랴.
기억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아들 오빠 아저씨 되어
말벗 해드리다가 콧등 뜨거워지는 오후.
링거 줄로 뜨개질을 하겠다고
떼쓰던 어머니,누우신 뒤 처음으로
편안히 주무시네.
정신 맑던 시절
한 번도 제대로 뻗어보지 못한 두 다리
가지런하게 펴고 무슨 꿈 꾸시는지
담요 위에 얌전하게 놓인 두 발
옛집 마당 분꽃보다 더
희고 곱네,병실이 환해지네.
시인은 시 읽기의 유익함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몸과 마음을 춤추게 하는 리듬(운율)의 즐거움
둘째,마음속에 그려지는 시각적 회화의 이미지
셋째,시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
넷째,이 세 가지를 아우르는 감성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공감각적 상상력'
가만 '참 예쁜 발'을 낭독해보노라니 확실히 마음이 춤을 춘다. 아주 느린 춤사위가 흐르는 듯. 하얀 공기가 만져지듯,그 뽀얀 발이 보이는 듯,그림 하나가 어룽거린다. 이 시 속에 숨은 얘기는 다름 아닌 나의 이야기이자 시인의 이야기,우리 모두의 이야기였지요. 이런 감성의 경계에서 피어난 공감각적 상상력으로 한참을 서성인다.
잔나비 울음 듣는 이여
버려진 아이에게 가을바람 부네
어찌하리오.
마쓰오 바소의 하이쿠를 읽다가 어미를 잃고 제가 써내려갔던 단장(단장) 에세이 생각이 나서 저 버려진 아이가 제 모습인 듯 먹먹하다. 나락의 끝에 이르러서야 사모의 정이 사무쳐서 다시 죄책감이 밀려든다. 시를 만난다는 건 잊고 있던 자신을 다시 만나는 일임을 재삼 깨달았다. 마음의 병이 깊어 수 개월 책마저 멀리하고 있었다. 어제 서울 나가는 길,오랫만에 전철 #달리는도서관 에서 다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KBS홀에서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공연 '크리스마스 칸타타'를 보고 마음이 따듯해졌다. 일상을 회복함으로써 잔잔히 평온의 강이 흐른다. 어제에 이어 다시 시인들과 그들의 삶의 편린을 들여다 본다.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따사로운 햇살에 주름 펴보는 마음.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들으며 루 살로메에게 연정을 바쳤던 릴케의 시구를 읽는다. '내 뇌에 불을 지르면,나는 당신을/ 피에 실어 나르겠습니다.' 릴케의 연인 루에게 사로잡힌 격정은 '그대를 위하여서는 나를 대적하여 싸워(윌리엄 셰익스피어 소네트 89중에서)'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여행을 떠나던 날,/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정채봉의 첫 마음 중에서)',시인들의 심장은 가슴 뜀이 멈추지 않는 천형을 지고 났나 보다.
그 뿐일까? '인생에서 죽는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하지만 산다는 것 역시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이네.' 라던 세르게이 예세닌. 술과 광기로 인생을 견뎌내다 30세에 자살하며 벗들에게 인사를 남겼다. 맨발의 춤꾼 이사도라 덩컨과 신혼의 꿈에 젖었던 그 호텔에서 잉크가 없자 손목에 그은 피로 써내려 간 시. 다음날 창문에 목을 매달고 깊은 잠에 빠졌다. 비운의 사랑,격정적인 사랑을 노래한 이 시들에 왜 유독 마음이 머무는 걸까? 시가 주는 고유한 정서도 한 몫하겠으나 감수성 예민하던 어린 날,저의 사유와 세계를 확장시켜준 주인공들이 그 시간들을 복기해주기 때문일 거다.
저자가 뽑은 시인들의 사랑시 50여 수가 다양한 변주로 연주된다. 친절한 해설사는 그 시에 얽힌 사랑과 배신,분노와 좌절,절망과 기쁨을 차분히 읽어준다. 때로는 시인이 머물렀을 그 곳엘 가서 시인의 공기를 느낀다. 또 시인들과의 교분을 통해 얻은 정보를 슬쩍 흘려두기도 하고. 때때로 시인으로 빙의하여 절창의 심경을 토로한다. 낭만이란 이제 50 이상 세대의 기억에서나 존재하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되는 즈음.그의 탐사는 그 자체가 순례요 회귀로써 무한한 향수를 부른다. 시나 예술들은 창작 상태를 떠나면 독자 혹은 감상자들의 몫이라 하지만 원작자의 창작배경을 알게 되면 확실히 그 뜻이 명확해지는 부분이 많다. 책에서는 그런 숨은 이야기들을 적절히 배치함으로 해서 호기심과 더불어 시인들의 인간적 면모를 읽어내며 공감의 파장에 함께 든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겨울밤은 영화 <닥터 지바고>를 압축했다. 오마 샤리프의 깊은 눈동자가 설원의 고독을 부른다. <서부전선 이상없다> 영화의 명장면을 제공한 요사 부손의 하이쿠. '나비 한 마리/절의 종에 내려앉아/잠들어 있다' 누가 언제 종을 칠지 모르는 적요의 긴장미와 고요하게 잠든 나비의 평화를 대비시킨 아이디어가 절묘하다. 영화 <토탈 이클립스>의 랭보와 저주받은 시인 폴 베를렌의 어긋난 파행적 사랑. 가을의 노래에서 '쇠잔한/ 내 신세 모진 바람 몰아치는 대로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낙엽 같아라. '라고 자신의 상태를 비유하고 있다. 절절한 고통이 절창이 되는 모순을 먹고 시는 자라난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시간과 순간을 훔치는 도둑이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을 선사한다.'라는 질베르 뒤끌로의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대사에 매료되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는 오영종의 사진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시로서 챕터마다의 메시지를 간명하게 전한다. 사진을 보는 일 자체가 명상이 된다. 조화를 이룬다는 거. 씨실과 날실이 적당한 균형을 이루며 서로의 차경이 되어 주는 것.
'젊을 때는 뭘 몰라서 바쁘고, 나이 들어서는 어중간하게 알아서 부산하다'고 하는 세상. 또 다른 나를 만나고 시공의 경계를 떠나 미처 경험하지 못한 생의 순간들을 체험하기 위해서 시를 읽자는 저자의 말이 과연 옳다.
꽃그늘 아래
생판 남인 사람
아무도 없네
- 고바야시 잇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