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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의 예술가 육코치 Jul 22. 2021

잃어버린 시간

<행복의 나락>/F.스콧 피츠제럴드/ 조이스박

잃어버린 시간, 죽거나 떠난 사람들, 돌이킬 수 없는 추억들.....

F.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세계에는 상실로 인한 허무함이 주를 이룬다. 허무함을 느낀다는 건 그 반대급부의 정점을 찍어봤을 때나 알 수 있는 감정이다. 아주 행복했거나 성공했거나 다 가졌는데도 그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극적 효과를 내는 드라마를 많이 봐서인지,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현실의 삶 덕이었는지 혹은 피츠제럴드의 깔끔한 서사 덕인지, <행복의 나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분명 환상을 쫓고 있는데도 억지스럽지 않은 느낌이 든다.

「오, 붉은 머리 마녀」 알리사 데어는 무희로서 당대의 남자들을 단박에 사로잡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마음을 부렸다. 그녀의 마법에 걸려든 멀린은 서점에서 일하다가 주인에게서 이어받은 서점에서 평생을 맴도는 삶이다. 일체의 감정을 걷어내고 무심히 사는 듯한 그의 유일한 관심거리는 캐롤라인이다. 자신의 환상 안에서 이름마저 자신이 지어두고 자신이 원하는 상태의 매혹적 숙녀를 짝사랑한다. 제멋대로인 캐롤라인이 자신을 비롯한 세상 모든 남자를 희롱한다. 그러나 강렬한 인상을 남긴 몇 장면만으로도 멀린에게는 캐롤라인(알리사 데어)은 영원한 뮤즈이다.

젊었을 때 사랑에 빠져들 때면 상대의 모습이 아닌 내가 이상향으로 그리는 허상 하나에 상대를 정렬시키며 몰입한다. 연애의 유효기간이 지나면서 긴장을 놓치는 찰나, 서로는 상대가 변했다면서 환상의 몰락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특권을 부인할 수 없다. 죽을 때가 거의 다 되어서야 캐롤라인의 정체를 인지하게 된 멀린은 절망한다. 낭비해버린 시간들에 대한 회한으로 괴로워한다. 캐롤라인이 무희였다는 걸 몰랐으면 어땠을까? 자신이 씌운 환상을 좇았을 뿐, 그녀를 사랑한 것도 아니면서 자신이 그린 모습이 아니라고 분노하고 있는 꼴이라니.

악플에 시달리고 우울증으로 생을 조기에 마감해버리는 어린 연예인들의 비보를 대할 때마다 누군가의 선망을 받는 입장이 결코 행복하기 힘들구나 싶다. 선망의 그림자에는 혐오가 똬리를 틀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본색을 드러낸다. 인기와 명예의 환상을 쫓는 그들에게 대중의 무관심과 거절은 두려운 기제였으리니. 붉은 마녀 캐롤라인은 늙어서도 여전히 당당할 수 있어서 일견 다행이다. 천박한 무희를 평생 짝사랑한 일을 시간낭비였다고 후회하는 멀린은 진정 환상을 쫓은 대가를 스스로 치르게 되리라.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고서야 행복했던 순간들이 빛을 발한다. 안전한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마냥 좋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10살 즈음, 우연하게 ‘슬픔’을 만나고 정말 가슴이 아팠다. 얼마나 시리고 아픈데 삶이 일시에 허공에 둥둥 떠 날아가는 구름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어린아이가 경험한 실체도 이러한데 사랑하는 이와의 황홀한 기억을 가진 이에게 날벼락처럼 떨어지는 불행은 무게를 재기 어려울 테다. 「행복의 나락」의 여주인공 록산은 인기 작가 제프리 커튼과 결혼하면서 뮤지컬 배우로서의 역할을 끝냈다. 온 세상이 둘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완전한 행복을 누렸으나 예비된 운명은 고문에 가까웠다.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서서히 사위어가는 제프리 커튼을 병구완하는 록산. 욕망에 찌든 아내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해 불행한 일상을 견디는 제프리의 친구 해리.

의식불명의 제프리를 여전히 찾아오는 해리는 어쩌면 불행의 동반자들이 있다는 것에 안도했는지도 모르겠다. 불행이, 고통이 저만 겪는 것이 아니라는 묘한 동지애가 발동되기도 할 테니. ‘내가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살면 되겠다고 작정하게 된 연유가 무관하지 않다. 자신이 겪고 있는 아픔이 얼마나 컸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나와 일정 시간 교감을 하고 나면 스스로 가벼워지면서 미안해하는 순간들이 온다. 록산과 해리는 서로에게 공감을 넘은 연민을 느꼈으리라. 차라리 서로 확 기대버렸으면, 서로 의지가지가 되면 안 되나 통속적인 바람이 저절로 올라온다. 그러나 그 둘은 날아본 그 시간들은 다 잊은 듯, 애시당초 날개가 없었던 듯 무심해지기로 하나보다 싶었지만 일상은 다시 흘러간다. 허기를 느끼는 해리, 제프리와 사랑했던 ‘기억’을 환상으로 놓치지 않는 록산.



“이제 밤에는 결혼의 영광과 고통의 산실이었던 방에 록산 혼자였다. 제프리를 다시 보기 위해 록산은 마음 속에서 그 멋진 시간들로 거슬러 갔다. 그 이후의 문제가 있었던 시절을 바라보기보다는 강렬하고 열정적인 몰입과 동반자 관계가 있던 바로 그 시간으로. 그녀는 종종 잠에서 깨어 누원서는 옆에 누군가 있기를, 움직이진 못하지만 숨 쉬고 있는 제프리가 있기를 바랐다.”


“방탕함이 그에게 부여한 쓸쓸해 보이는 분위기에 끌렸던 것이었다 그녀 내면의 어떤 성정이 자신과 전혀 다른 성정을 지닌 이방인에게 다가가도록 만들었다. 예측불허의 잠재적인 모험을 약속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 141쪽

스콧 피츠제럴드의 인간 내면에 대한 섬세한 탐구를 알 만한 대목. 모르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처럼 여기거나 유독 호기심을 내는 사람이 있다. ‘나쁜 남자’와 ‘나쁜 여자’가 여전히 치명적 매력을 뿜어낼 여지를 주는 지점이다. 학교 다닐 때 의외로 지독한 모범생들이 상대는 화려한 용모의 사람, 바람둥이들에게 끌려 연애를 하거나 결혼하는 경우를 많이 보지 않았던가? 외모가 주는 매력도는 시대를 막론하고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새로 돋는 잎」 의 줄리아는 방탕한 남자 딕을 자신이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나 역시 어려서는 그런 치기가 있었다. 내가 마치 남자친구를 구원한 듯한 착각을 자주 했고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뿌듯해했다. 착각이라는 망상은 여러모로 쓰임이 있었던 걸로.


“환상으로 시작해 환멸로 끝난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 삶에서 환상에 환멸에 따라오는 전개는 시간 순이지만, 우리 삶의 의미는 시간 순과 무관하지 않은가. 환멸을 겪으면서도 환상을 끝까지 놓지 않는 능력, 피츠제럴드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는 것처럼 우리 삶의 의미도 이 샴쌍둥이를 잘 껴안을 때 드디어 생겨난다고 믿는다. 단편 ‘행복의 나락’의 남녀 주인공이 환상과 환멸을 둘 다 품에 안고 잘 추스르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16쪽

나는 피츠제럴드의 문장들이 물론 좋았으나, 마지막 역자의 이 문장들이 보여주는 관조한 듯한 ‘수용’이 참 좋다. 완전하진 않으나 온전할 수 있는 존재, 나와 너는 이토록 모순을 한 몸에 담은 불완전한 존재다. 그래서 하루에도 수만 번 위아래로 날았다 추락했다 명멸하는 존재, 후회하는 한이 있더라도 또 행해보고 또 깨지면서 깨달음의 폭을 넓혀간다. 표지의 그림처럼 눈만 가린다고 ‘진실’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알면서도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내 마음은 또 당하면서 책임지는 수밖에. 겨울밤이 참 길다. ‘행과 불행’을 두고 이렇게나 주절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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