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 윈프리
'맛있는' 이란 단어를 언제나 사랑하는 오프라 윈프리. 맛있는 식사보다 더더욱 유쾌한 맛있는 경험 한 토막.
생일 하루 전날, 8명의 친구들과 마우이에 머물면서 스파를 겸한 휴식 중에 흐밍으로 노래를 불렀다. 2년 정도 명상 때마다 듣는 스나탐 카우르의 노래들을. 동석한 친구 마리아와 영적으로 통했음을 발견하며 무척 기뻤다.
'그럴 줄 알았으면 스나탐 카우르를 초대할 걸ᆢ' 스쳐간 생각 중에 있었으나 자신을 위해서는 정성을 들이지 않았다. 잠자리에서 마리아를 위한 일이었다면 자신이 분명히 기획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극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이 머물렀다.
이튿날, 오프라 윈프리의 생일. 어디선가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맙소사, 스나탐 카우르가 자신의 악단을 이끌고 그녀의 테라스로 나타난 것.
"네가 너 자신을 위해서는 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우리가 너를 위해 한 거야."
오프라가 스나탐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친구들은 밤새 스나탐의 행방을 찾아 이곳저곳 연락 닿는 곳을 수소문했다. 예정한 일인 양, 스나탐은 반경 30분 거리에 콘서트를 하기 위해 머물고 있었다. 스나탐 카우르 역시 오프라 윈프리를 위한 자리라면 영광이라면서 친구들의 청을 수락했다.
살면서 겪은 가장 멋지게 놀라운 경험이었다는 오프라 윈프리는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난 방식, 그리고 그날이 마침 자신의 생일이었다는 것까지도 너무나 맛있는 경험이어서 이 여러 겹의 의미를 해독하려 애쓴다고 했다.
너무 아름다운 광경이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심심상인(心心相印)하는 친구를 가졌다는 건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 느낌일 것이다. 순간순간 만나는 감동의 합이 내일을 살아가는 자양분이 되는 것일 터. 그런 친구를 그대는 가졌는가? 잠시 멈칫하겠으나 하나쯤은 있다 싶다. 그런데 더 확실한 건 나는 그런 친구에 가까우려 노력한다고 자평한다.
또 한 차례 어퍼컷을 맞으며, 오뚜기 세포가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그래,날 쓰러뜨리려 별 짓을 다해봐라. 속절없이 무너지는 바보같은 짓은 지난 번 긴 침잠으로 충분했어. 맷집을 키우느라 유난히 파고들이 닥친다. 그런들 어쩌랴, 전생에서건 지금 삶에서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내가 짓는 숱한 업보가 있나보다. 연기설에 의한 것이든 그리스도가 날 사랑해서 끝없이 깎고 또 깎아내는 것이든 겪어야할 일이면 다 이유가 있겠지.
오프라 윈프리의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 중 많은 이야기에는 '지금 이 순간'을 제대로 느끼고 사는 일에 대한 통찰로 가득하다. 그의 다정하고도 따끔한 일침들이 끊임없이 나를 일깨운다. 마치 나는 그의 토크쇼에 초대되어 다정한 취조(?)를 당하는 듯 때로는 부끄러움으로 화끈거리다가 때로는 토닥토닥 위안을 얻는다.
'지금, 여기'의 진실 외에 다른 뭐가 또 필요할까? '내 마음이 지옥'일 때는 지금 이 순간, 나의 현존을 보지 못한다. 흘러간 시간,혹은 닥쳐올 불안에 대해 전전긍긍하느라. 미약한 호흡이나마 멈추지 않는 지금의 진실을 외면하는 어리석음이라니. 수없이 흘러가는 망상과 사유 속에서 나를 잃지 않는 것 역시 지금 이순간의 내가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상태로 있느냐다.
오프라 윈프리의 얘기로 깊은 통찰이 일어난 지금, 살아있어 느끼고 배우는 감사한 순간. '감사'라고 쓰는 중에 또 불평이 터지는 요상한 마음. 끊임없이 단짠단짠의 변주를 살아내는 내 마음. 시골살이의 고달픔은 이미 설정되어 있었고 결국은 내가 적절한 행동으로 상황들을 장악했어야 한다. 전철이 자주 안 와서 문제야라고 슬쩍 책임을 떼넘기게 되는 이런 유치함이라니.
간헐적으로 달리는 전철, 간발의 차이로 놓치고 나면 '꼼짝없이 묶이는 시간들'이라고 불만을 일삼는 마음 한 켠에, 그래서 글쓸 여유도 갖게 되고 나를 살피게 되는 귀한 시간이라고 기뻐하는 내 마음도 공존한다.
찰찰찰,관찰ㆍ성찰ㆍ통찰의 열차는 끊임없이 달린다. 지금 여기를 살라.
달리는 도서관에서 순간적으로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을 발견하며 적다. 선물같은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