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불황에도 살아 남는
서두르지 않아도 만나진다. 배움이 일어나는 분들은 곳곳을 지키고 있다. 두물머리의 곽지원빵공방 겸 내다홍 갤러리는 스승과 제자가 도란도란 재미나게 운영하는 빵가게가 되었다. 주인장 이경화님의 스승인 곽지원 교수님을 만나뵌 것도 행운이었다.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으로 단박에 알아보겠다. <장인의 장사>라는 책을 3월에 내고 3쇄를 찍었다. 전국 그가 양성한 제자들이 200여개의 빵집을 냈단다. 지금 하고 있는 21기를 마지막으로 이제 후진 양성은 않을 결심을 하고 있었다. 아카데미 한 번 열 때마다 수천만 원, 근 일 억이 왔다갔다 한다는데 굳이 그래야 하나 의아했다. 우리밀과 천연효모종으로 천연발효빵을 만드는 그의 기술은 누구라도 선망하고 배우고 싶어한다. 아직도 창창하게 후진 양성을 해도 되겠건만 싶어 의아해하는 우리에게
“나는 쥐었던 주먹을 잘 펼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아요. 손을 펴야 다시 새로운 다른 것을 쥘 수 있다는 이치를 아는 때문이지요. ‘박수 칠 때 떠나라’고 하듯 전 그 순간을 감지하면 과감하게 실행할 줄 아는 것 같아요. 의도했건 않았건 결과적으로 그 선택들이 옳았어요. 제가 양성한 제자들만 해도 200여 명이에요. 전 그 제자들이 다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어요. 창업 컨설팅을 할 때도 기존의 제자들 가게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원칙이 있지요. 이제 이미 그 정도면 충분하다 싶어요. 더 이상 늘리다가는 제자들끼리 서로 물어뜯는 꼴이 되어요. 전 그걸 원치 않아요. 이제 저도 하고 싶은 일을 해봐야죠. 아카데미가 종료되고 나면 전 코이카에 지원해서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의 현지인들에게 빵을 구워주고 창업해서 자립하는 일을 돕고 싶어요. 나이 70이 되는 시점부터는 빵 투어를 다니려구요. 한 나라에 6개월간 머물며 현지 최고의 숨은 빵집에서 일하면서 빵도 만드는 거지요. 그들의 문화나 노하우도 배우고 나머지 6개월간은 그곳에서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쓰는 거지요. 한 해에 한 나라씩 옮겨다니며 계속 써나가고 싶어요. 죽을 때까지 빵을 만들어 누군가의 배를 채우는 일은 참 좋아요. 서울에서 잘 나가는 빵집 3개를 정리하고 양평에 들어올 때 사람들이 만류했어요. 그런데 저는 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어요. 자동차 문화, 인터넷의 발달, 사람들의 미식 욕망 등을 읽었어요. 2005년에 들어올 때 샀던 이 건물과 아카데미 건물이 수십 배 올랐고 지금까지 저는 여전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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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을 버리지 않은 눈동자, 신념으로 확고한 눈빛, 확신에 찬 입매, 여유로운 웃음이 만든 보기 좋은 주름. 본질과 기본에 천착하여 일가를 이룬 이의 단단함에 매료되었다. 간간이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도 예리한 분석과 시대를 읽는 통찰. 수시로 아이디어가 샘솟듯 터져 나는 그를 향해 바보 도 터지는 소리만 연신 쏟았다. 창업이 아니라 취미로 혹은 봉사하려고 라는 동기를 가진 이들은 문하생이 될 수 없었다. 자신부터 잘 살고 가족을 건사할 수 있고 난 후에 봉사를 하든 더 좋은 일에 헌신하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돈을 터부시하다시피한 나를 책망하는 듯해서 부끄러웠다. 그러게, 얼마나 현실적이고 솔직한 얘기인가? 풍요로워야 소신도 지켜낸다는 평범한 진리. 그 역시 암을 겪으면서 임사 체험을 한 덕에 덤처럼 주어진 삶에 대해 더욱 농축된 언어로 살아내고 있었다. 후진들의 앞길을 막아서도 안 되겠기에 이제 또 배우고 익히는 모든 기술을 이미 배출한 제자들에게 적용하고 함께 고민하겠다는 자세. 문득 생각나는 제자가 있으면 안부 전화하는 듯 몇 시에 가게를 여는지 물어보고 가게 열기 삼십 분 전에 가서 대기해 있는단다. 새벽 4시 반부터 제자가 문 열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빵 만들면서 점검해주고 전수해주는 스승. 새벽 빵 구워내고 인근 식당에 데리고 가서 밥 한끼 사먹이고 헛헛이 돌아오는 사람. 그 스승의 뒷꿈치를 보며 제자들이 눈시울을 붉힐 듯하다. 40대 50대 삶의 전환기에서 절박함이 차오른 가장제자들의 삶을 덩달아 책임지는 극적인 공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장인의 장사> 책을 읽으면서 그가 꾹꾹 눌러 말하던 단어들의 의미를 되새겼다.
대학교 입학금을 차용증을 쓰고 친구 아버지에게서 빌려온 그 순간이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그는 대학을 입학한 후 1학기 여름방학 때부터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었다. 집 부근의 해수욕장에서 몽마르트 언덕과 목이 마르죠를 패러디한 이름의 ‘몽마르죠’ 술집을 여는 일로 장사의 길에 들어섰다. 철저히 수요조사와 입지 조건 등 허투루 접근하지 않았다. 보험 영업을 하던 때는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십분 살려, 금융상품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는 등 신뢰감을 보인 행동으로 연고 가입이 아닌 현장 영업을 했다. 지점장을 제안받을 정도로 유치율이 좋았다니 놀랄 일이다. 세 번째 아르바이트는 역시 해수욕장에 몇 개월 전에 임대를 한 곳에 재임대를 해서 공간을 확보도 하고 돈도 미리 벌고 여름에 본격적으로 무도장을 열었다. 동종의 무도장이 열리자 ‘원카바레’라는 이름으로 차별화한 기민성. 그런 후에 호텔의 단체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호텔에서 영업을 미리 해서 고객확보를 했다. 놀랄 일은 그 이후로도 이어진다. 군대를 제대해서 청파동에 한참 분위기를 타던 ‘아가페’라는 경양식 집을 열기도 했다. 주방장들이 재료를 빼돌리는 등 파행적인 행동으로 예상처럼 돈을 벌지는 못했으나 귀한 경험을 또 얻었다.
특히 국가 정책이 환경보호와 자원 재활용에 관해 주의를 기울일 때는 학교에서 동아리 활동처럼 학생들 20명을 모아 ‘넝마주의’ 사업까지 했다. 고층아파트를 돌다가 관리원들에게 쫒겨 나기도 하고, 시영아파트에서 제법 수집했다 싶었는데 기존의 수거하는 어른들에게 혼이 나서 갈 수 없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뜻이 아무리 좋아도 항상 현장에서 생기는 변수들 앞에서 벽을 만났다. 특히 20명이나 모아서 시작한 리더로서의 부담감은 떨치기 힘들었으나 자신이 살고 있는 주택가를 돌면서 돌파해나갔다. 시대의 흐름을 읽는 눈, 성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더불어서 정당한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려는 태도. 모든 현장에서의 경험으로 타인을 제대로 읽어냈으며 타인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졌다. 그래서인지 이후 그가 본격적인 자기 사업으로 경영할 때 현장에서 배운 모든 것들이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해주었다. 단돈 백 만원을 들고 아내와 함께 ‘자기 장사’를 할 기술을 배우겠다고 나섰다. 무엇을 배울지도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일본으로 가서 찾아낸 것이 제과 제빵 기술이었다. 성공하는 장사가 아닌, 끝까지 살아남는 장사가 무엇일지를 숙고한 결과 제과 제빵을 배우는 일이었다. 학업의 시간동안도 빵집에서 일을 하면서 낮에 눈동냥 귀동냥했던 것들을 숙소로 돌아와서 정리를 하거나 반드시 연습을 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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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제과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연이어 아카데미에서 심화를 하면서 과일장사를 하면서 큰 돈까지 벌었다. 긴자와 신주쿠에서 야쿠자들의 등쌀에 깡과 악으로 버티고 우기며 입지를 다졌다. 방과 후 과일 트럭 행상으로 4억 6천만 원을 벌었다니. 시장의 생리도 배우고 배짱도 키우면서 일본에서의 시간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프랑스로 연수를 떠났다. 말도 통하지 않으면서 특유의 성실과 깡다구로 프랑스에서조차 유명 제과제빵점에서 기술 연수를 할 수 있었다. 지독한 연습벌레이자 핵심을 꿰뚫는 본질에로의 천착. 일본에서 과일 장사로 큰 돈을 벌자 유혹도 따랐지만 그는 자신이 일본에 돈을 벌러 온 것이 아니라 돈 버는 방법을 배우러 왔음을 잊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서 주(主)는 무엇이고 부(副)가 무엇이지 가치전도를 하지 않았다. 언제나 성공하는 편이라 언제나 안정에 대한 유혹이 따라다녔으나, 결정적 순간 제대로 놓을 줄 알았다. 욕심이 순수 의지를 절대 점령하지 못한 셈이다.
그가 정립한 절대 망하지 않는 장사의 20가지 비결은 곧 삶을 살아가는 자세이자 철학이다. 장사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자신의 삶을 이런 자세와 태도로 살아간다면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 가난이 지긋지긋해서 자신의 길을 찾아 나갔던 한 사나이는 일단 실행하고 보자로 장사의 길에 들어섰다. 고비고비 성공과 실패 모든 과정이 인생의 수업료라 여겼다. 하나의 일가를 이루며 장인의 길에 서기까지, 나를 장사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현상이 있다 하더라도 정말로 장사하러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 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 단계 밟기를 놓치지 않았다. 화려한 맛은 아니어도 밥처럼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고 소화가 잘 되는 건강한 빵을 만들 것, 그리고 언제나 고객과 직원들에게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 장인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술을 축적해가는 사람으로 젊은 제자들에게조차 배울 태세가 되어 있다. 장인의 장사는 제자들을 육성하여 다음 세대로 장인의 정신을 잇는 일까지 하고 있다. 같은 길을 가는 동료 공동체를 만들고 공동체가 할 수 있는 따듯한 이웃이 되어 지역사회에서 사랑받는다. 책 전반에 흐르는 그의 경영철학은 ‘사랑’이 바탕이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의 싯구 처럼, 돌아가는 날 소풍 잘 끝냈다고 말하며 웃길 바란다며 순수한 웃음을 지어보이던 표정이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스승으로 살다 죽어가는 인생, 그만하면 되지 않았느냐고? 되다 말다. 자신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백 명의 제자를 가진 분이 어찌 평범한 삶이었을까? 동생 현옥은 연신 감탄과 감동으로 쏙 빠져들었다. 사람책 한 권을 읽은 양, 꽉 차올랐다. 그의 말처럼 세상엔 잘난 몇 사람이 만들어간 게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간 사람들 덕에 돌아가고 있었다. 식염수에 계란을 넣으면 상한 계란은 둥둥 떠오른다. 온전한 계란은 식염수 바닥에 짝 깔려 요지부동이라고. 식염수 안 바닥부터 채우고 있는 그 평범한 개인이 묵묵히 크로노스의 시간을 만들어가는 것임을 확인한다. ‘바닥에서 30cm 정도 붕 떠서 부유하는 현대인들이 참 안쓰럽다. 왜 발을 땅바닥에 디디고 걸으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쓴 웃음을 짓는다. 꿰뚫어보듯 초롱하던 눈동자가 정말 별처럼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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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존중과 환대의 코칭식탁’ 1기분들과 나눈 이야기 중에서 우리 전체의 사명과 비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우리는 코칭을 왜 하며 코칭을 통해서 어떤 변화가 있었고, 개별적 변화가 이끈 영향력은 또 무엇인지 나누다 보니 저절로 길이 보이는 게 있었다. 나의 길을 찾고자 한 이들이 어느새 코치의 길을 걷게 되었고, 진정한 코치다운 코치가 되어 후대에게 이어주고 싶다는 생각들을 저절로 하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결로 삶의 무늬를 그려나가면서 함께 의식 훈련을 하고, 또 서로 의존적으로 격려하고 지지하며 상호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자신의 삶을 규정할 수 있고 자신의 언어로 개념을 세울 것. 나의 언어를 내가 만들어 갈 것. 나다운 길을 가는 친구들이 많이 늘어나길. 이심전심인지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의 <소년> 그림이 떠올랐다. 곽지원 장인의 자족의 웃음이 딱 이런 느낌이었다. 나는 이런 웃음을 지을 수 있는가? 소년은 무엇으로 저리 만족스러울까? 결코 신분이 높아 보이지도 않고 잘 사는 집 자손 같지도 않다. 그런데 이토록 만족한 웃음이라니. 소년과 눈을 맞추며 교감하는 개의 뒷모습도 얼마나 다정한가? 바르톨로메는 그 자신이 고아로 자라서 고아나 장애인 같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이 깊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담은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는 종교화가 아니면 풍속화로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극적으로 담고 있다. 가난한 가운데도 그 자신만이 일굴 수 있는 풍요가 있다. 슬픔 가운데도 기쁨이 존재한다. 어두움 가운데 빛이 난다. 자신을 향해 저토록 만족스런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상태. 순수의도가 깃든 자리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