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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의 예술가 육코치 Jun 06. 2023

글쓰기란 삶 그 자체

#너의ㅡ말이ㅡ좋아서ㅡ밑줄을ㅡ그었다 #림태주


가장 단순한 삶의 문장을 꿈꾼다는 림태주 작가. 그의 전작들을 다 읽었고 좋아한다. 그런데 그에게도 고백했듯이 <그토록 붉은 사랑>이나 <이 미친 그리움>을 읽어내는 일이 내게는 참 어려웠다. 전반적인 느낌은 분명 좋은 건 맞는데 내 안에 안착해 앉지를 않았다. 비현실적으로 여겨져서 둥둥 떠 있는 부유물들 같았다. 내 안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낯선 언어들이 마냥 아름다이 피워 올랐다. 왜였을까? 참 이상도 하다 했는데 이번 책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를 읽으면서 알 것 같았다. 전작들에서 분명 아름다운 언어들인데 왜 유독 내게만 안 안기는지. 체화된 정서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번 이 책에서는 한 마디도 빠지지 않고 와락 안겨들었다. 나도 모르게 뻘겋게 때로는 무뚝뚝하게 밑줄을 그어대고 있었다.



”인간의 독서 행위를 뇌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저명한 인지신경과학자 매리언 울프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난독증 상태로 태어난다. 즉 처음부터 책을 읽을 수 있는 뇌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다....중략....‘독서는 뇌가 새로운 것을 배워 스스로를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인류의 기적적인 발명이다.’ 뇌가 독서하는 방법을 배우면 독서하는 뇌가 발달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뇌의 독서 회로에 따라 자연스럽게 반복적인 독서 행위가 가능해진다는 주장이다“     - 220쪽


이런 엄청난 발견이라니? 난 언제나 자신있게 얘기하는데 ‘지극한 한량’이 내게 딱 맞는 컨셉이고 삶의 지향이라고. 향유하느라 택한 독서가 이런 엄청난 노력을 요한 일이었다니 난 얼마나 대단한 발명행위를 한 거야? 싶다. 그나마 읽기의 쓸모를 깨달았기에 요 모냥이라도 유지했던 모양이다.


작가는 강화도에 낡은 가옥을 사서 한옥 꾸미기에 여념 없어 회사도 나몰라라 하고 있는 상태인 듯했다. 작업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미며, 어찌나 정성을 들이고 있는지 시전하기 바쁘다. 그에게 감히 한옥의 형태를 잡고 현장에서 한 손이라도 거들 엄두를 내게 했던 일이 목공 수업이지 않을까 싶다. 책에서 목공 수업에서 얻은 자르기와 켜기에 관한 통찰을 얘기한다. 혈기왕성하게 헛살았다고. 그 만의 일이었을까? 모든 일을 힘으로만 해결하려 했고, 쉬이 해결되지 않으면 근육키우는 일에 전념했단다. 힘을 기르기 위해서 근육이라도 키웠구나, 나는 지레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가기 바빴다. 비대해진 힘줄을 드러내며 노력이라도 한 그와는 달리 숨기만 했다. 


‘역류하며 살아온 날들이 톱밥처럼 켜켜이 쌓이는 동안 나의 일상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나의 힘들은 억지스럽고 무모한 단절을 감내하느라 또 얼마나 쓰라리고 힘들었을까. 유심히 마음의 결을 살핀다’     - 166~167쪽


내가 쓰는 글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사람이 엄마다. 울 엄마를 떠올리는 이야기에 한참 서성였다. ‘삶이 글을 만드는 순간’에서 얘기하고 있는 친구의 어머니 성품이 울 엄마를 닮아있다. ‘내가 하기 싫은 건 상대에게도 하게 하지 말라’셨던 엄마. 작가 친구분의 행동에서 그 어머니를 짐작할 수 있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생활은 의식의 표면이고 삶의 깊이를 반영한다.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고리이고, 이성과 감성을 결합하는 지점이다. 생활은 속일 수 없는 그 사람의 진실이다.’-200쪽


정말 그랬다. 얼추 2년은 되어가나 보다. 작가가 연 글쓰기 교실을 다녔다. 매번 과제물로 1페이지짜리 글쓰기가 있었다. 첫 과제물을 제출하고 피드백을 받았는데 말로 매를 맞고 여진이 오래갔다. 당시 피폐한 내 삶을 반영하듯 내가 쓴 글에는 독설이 난무하고 말이 칼을 물고 있었다. 뾰족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작가는 평소의 성정대로 에두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아주 혼을 냈다. 그게 애정이란 걸 알기에 나는 쓴 울음을 삼켰다. ‘좋은 글을 쓰고 싶으면 좋은 사람이 되어야죠.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속내를 들켜버려 무참했다. 매주 겨우 글을 써내긴 했지만 얼어붙은 마음이 꼼짝을 하지 않았다. 고민 없이 써나가던 글쓰기가 고통이 되어버렸다. 여전히 솔직할 자신도, 좋은 사람도 될 자신도 없었던 나는 기가 옴팡 죽어버렸다. 


잘 쓴다는 게 뭐였을까? 좋은 글을 쓴다는 건 또 뭘까? 해답을 일러주려는 듯,

”소중한 걸 내놓아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 내놓을 게 마땅치 않다면 내놓을 만해질 때까지 준비하며 기다려야 한다. 결국 내놓는 그것은 글이 아니라, 내가 준비하고 가꿔온 인생 하나인 것이다. 그 인생의 경과를 진정성이라고 하고, 진정성은 자성이 있어서 사람을 끌어당긴다.“ - 214~215쪽


작가가 말한 것처럼 테크닉의 영역이 아닌 본문은 삶 자체라면 나는 아직도 삶의 내용을 채우지 못했거나 여전히 진실의 문 앞에 서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까칠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감하기도 한 작가의 마음 궤적을 좇는 일은 가만한 즐거움이 있다. ‘고요의 원리’를 찾아 휘적휘적 돌아들었을 선암사나 미황사에서 공명의 북소리를 듣는 듯도 하다. 늦은 오후에 오르기 시작하는 산사로의 길은 공기마저 다르다. 노을을 맞을 준비를 하는 대지는 푸른 서슬을 잠시 뿜어낸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천천히 올라 가만히 서 있으면 서서히 내리던 어둠. 그 적요를 사랑했다. 작가의 섬세함은 마당에 피어난 꽃들에게서도 고요를 발견했나 보다. 나는 그냥 통째로 다가드는 그 적요가 좋았다.


림작가가 아무리 턱수염을 기르고 산적처럼 머리를 길러대도 그는 언제나 식물성이라고 각인되어 있다. 그는 확실히 꽃을 사랑하고 나무에 주의를 기울이고 자연에 기댄 정서가 그득하다. 그를 풍요롭게 하는 부분이 그 순응의 자연스러움을 그리움에 빗댄 향수라는 것을 또 확인한다. 내겐 통째로 꽃인 그들과 그는 살뜰한 밀어를 나눈다. 좋아도 어떻게 다가서는지 어떻게 표현하는지 모르는 나와는 달리 그는 경지에 이른 듯하다. 핏빛 동백의 그토록 붉은 사랑을 고스란히 안아 든 그였다. 주저함의 미학도 꽃들과 나무를 돌보는 마음에서 피어났을 테다. ‘산다는 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언어로 삶을 정의하는 일이라서(8쪽 중에서)’,‘인생이란 어떤 사람에게 선을 잇고 어떤 언어에 줄을 그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이다.(8쪽 중에서)’ 그의 진심을 잘 확인했다. 


이젠 내 진심을 잘 보일 차례인가? 나는 지금 어떤 사람에게 선을 잇고, 어떤 언어에 줄을 긋고 있는가?


#진성존재코칭센터 #육코치 #전성코치육현주 #림태주너의말이좋아서밑줄을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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