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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의 예술가 육코치 Jun 07. 2023

다산 정약용을 품다

다산의 유배지 강진 땅을 밟으며......

이른 새벽,남도로 남도로 차를 달렸다. 유배길 오른 정약용이 마음으로는 열 두번도 더 돌아봤을 두물머리. 새벽안개는 고요하고도 신비로웠다. 일행들이 이어가는 정담을 배경음으로 나는 뒤늦은 봄빛의 향연을 즐겼다. 연연한 연둣빛이며, 채 발화되지 않은 분홍빛이며, 스펙트럼을 이루는 녹색의 퍼포먼스. 자연의 생은 이토록이나 찬연하다. 


강진군청,12시를 조금 넘긴 시간으로부터 진성아카데미의 '진성리더를 찾아서-다산 정약용 편' 여정이 시작되었다. 남도의 맛을 흠씬 느낄 대구 지리와 모주. 걸쭉한 주인장의 호탕한 민요 한가락까지 얻어들었다. 다산이 처음 강진에 왔을 때, 갈 곳 없어 처량한 신세, 조건 없이 품어준 노파의 인정이 저러했으리라. 갓김치로 남도의 깊은 향을 삼켰다. 




불광불급(不狂不及)

이번 여정은 무언가에 단단히 홀린 이들을 찾는 길일 수 있다. 다산은 당연지사, 향토학자 양광식 선생, 강진 땅에서 정신 혁명을 일으킨 다산과 강진 사람들의 18년 행적을 쫒아 고증과 기록을 남기고 있다. 또 한 사람, 다산이 좋아 다산교육전문관을 수행하고 지금은 다산TV를 통해 다산정신을 알리고 있는 진규동 박사. 세 사람은 시대를 초월하여 ‘목적 있는 삶’이라는 화두로 우정을 나누는 게 아닐까 싶었다. 


사의재(四宜齋), 생각과 용모, 말과 행동을 적절하게 근신할 것을 주문한 다산의 정신이 녹아있는 재실. 그 재실을 지키고 있는 주막이 다산을 처음 거둔 곳이다. 마치 문둥병 환자 보듯 하는 시선을 개의치 않고 먹이고 재운 노파는 과연 여장부이자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정약용더러 '남자는 씨를 뿌리고 여자는 토양이 되어 나무를 가꾸는데 그 공적에 있어 어찌하여 남자의 공만 기리고 여자는 함부로 대하요? 남자는 씨를 뿌린 것으로 끝이지만 그 씨가 잘 자라나도록 토양이 모든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으니 똑같이 그 공을 누려야하잖소?'라며 부당함을 표했다. 



다산은 근 1년여를 실의에 빠져 있다가 이 촌부의 말에 각성이 되어 삶의 목적이자 존재 이유를 찾았다. 이에 인근의 어린 학동들을 모아 제자로 삼았다. 다산은 제자들과 600여 권에 가까운 방대한 양의 저술물을 쏟아놓았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오지 않았어도 저렇게 다작할 수 있었을까? 한양 도성과 멀리 떨어져 있는 강진에서 아전, 관아의 관리, 백성들의 희노애락을 체득함으로써 한낱 이론으로 끝나지 않았다. 주모의 일생을 관통하는 질문이 정약용의 서학 천주학 정신과 맞닿았다. 백성을 사랑하는 긍휼감을 실제 삶에서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 처절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정치란, 경제란, 윤리란 무슨 의미인지? 근원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서 자신은 왜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묻고 또 물었으리라. 





다산과 제자들의 행적 따라 문헌을 찾고 고증하여 기록하고 있는 양광식 선생을 극적으로 만났다. 외지인들을 만날 이유도, 필요도 못 찾는 선생이 약속되었던 만남마저 거부했었다. 진규동 박사의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그의 순수한 마음이 가 닿았던 걸까? 아침 식사를 하러 짱뚱어탕 식당 앞 길에서 마주친 것. 우리에게 달려와 양선생님 마주쳤다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진박사님. 미소년의 흥분을 그대로 보여줬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양선생님의 학당을 갈 수 있었다. 많이 쇠약해져 기력이 없으신 듯하나 눈빛만은 형형하니 범접하기 어려운 권위가 느껴졌다. 양선생님은 정약용을 사모한다기보다 정약용을 품은 강진 땅을 사랑하고 정약용과 인연을 맺은 제자들이나 강진 사람들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강진이라는 토양이 품은 시대정신과 저항 정신이 정약용에 의해 집대성되었으며 그 사상이 결국 동학을 일으키는 주요 동기와 사상적 배경이 되었음을 피력하셨다. 강진땅의 묻혀진 역사를 전하려는 선생의 천착이 몇 권의 책으로, 색인으로 남아 있었다. 육필로 써내려간 책이 한쪽 벽 책장을 가득 채웠다. 사라져버릴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입신양명의 수단으로서만 학문하는 이들에 대한 원망으로 선생의 회한이 사무친다. 자신의 공부 뒷바라지를 위해 헌신을 아끼지 않은 아내에 대한 예우를 몸소 보여주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길은 사색의 길이라 불린다고 했다. 과연 그럴 만했다. 길은 순한데 숲의 변화를 다양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운 길로 손꼽는 이들을 통해 여러번 들었는데 명불허전이다. 타박타박 걷는 걸음이 향기롭다. 하루에도 몇 번씩을 오가며 혜장 스님과 다졌을 우정도 상상이 가고, 제자들과 심오한 진리를 논하며 오가기도 하지 않았을까 선한 그림을 그려본다. 다산초당의 툇마루에서 다산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제자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두고 온 자녀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천일각 정자에 수시로 올라 그리움을 달랬겠지. 탐진강과 탐진 바다가 합수되는 지점의 지형은 고향 두물머리를 닮아있다. 미세먼지가 가득해 강줄기를 볼 수 없음에 다산의 마음이 느껴져 답답했다. 대나무숲을 지나치며 다산의 곧은 정신을 다시 새겨본다. 군데군데 허드러진 모란이 어찌나 탐스러운지? 송이째 뚝뚝 떨어져 군락을 이룬 동백은 그래서 더욱 섧다.


다산의 유배된 삶을 그리자니 빅터 프랭클과 신영복 선생 생각이 저절로 났다. 그들은 상황이 여하하건 주체적 선택을 한 사람들이다. 공간의 제약에도 굴하지 않고 정신은 그 홀로 자유롭기를 선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들을 일상처럼 행했고, 그 시간의 축적이 훗날 세상의 의미가 되었다. 천일각 정자에서 도반들이 각자가 느낀 것들을 풀어내며 강진의 바람을 채웠다. 현장이 주는 생생함, 숨결을 느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곳이어야 알 수 있는 공기의 내음이 있다. 강진이라는 곳을 비교적 상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음은 향토 문화해설사 이을미 선생님 덕이다. 맛깔진 말씨로 곁들이는 적절한 해설, 풍류가 느껴지는 용모, 덕있는 품성이 곳곳에서 빛을 발했다. 어디를 가든 환영받았다.





해넘어가는 가우도의 전경도 아름다웠고, 김영랑의 생가와 모란 공원도 인상적이었다. 모란꽃은 너무 활짝 피어나서 나는 좀 부담스러웠는데 담장 곳곳의 땅에 무리지은 모란이 장관을 이뤘다. 날을 딱 맞춰가서 넓은 집터 곳곳, 백련사의 군데군데 흐드러진 모란이 화들짝 반겼다. 낭만가객다운 영랑, 최승희와 온전히 피워내지 못한 러브 스토리를 들으며 어긋나는 운명에 대해 또 생각해본다. 강진만 생태공원도 깔끔하게 조성이 되어 있어서 강진의 고운 숨결을 맘껏 마셨다. 짱뚱어탕도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고, 달 포 전에나 예약 가능하다는 한정식집의 정식도 받아 먹었다. 인구 5만에 불과하다는데 활기가 넘쳤다. 내가 사는 양평보다 훨씬 크고 상권이 발달한 느낌이라 신기했다. 제주도로 갔던 청년 그룹들이 강진으로 대거 옮겨 지역사업에 동참한다더니 그래서인가 싶도록 깔끔하고 체계적이었다. 청자박물관, 민화박물관을 관람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코스였던 백운동원림 초입에서 널찍한 차밭도 만나고, 조경사적 가치가 뛰어난 백운동원림의 12경을 만났다. 대나무숲, 유상곡수의 풍류, 추사의 글씨를 만나는 수소실, 정선대 등, 계곡과 담장이 어우러진 경관이 자연스러운 곡선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풍류가객이 된 듯 마음이 한없이 늘어져서 여유로워졌다. 자연이 주는 회복력은 그 무엇과도 비교가 안 된다. 5시간 여 운전을 하고 돌아오면서도 피곤함을 못 느꼈다. 다산의 헛헛한 발걸음을 쫓아 노마드로서의 행차가 어찌나 좋았던지. 강진군의 멋진 제안이 자꾸 아리삼삼하게 한다. 1주일 강진 살이를 군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두 집을 연결해서 1주일간 지내는데 1일 숙박과 2식을 제공하는데 총 23만원만 부담하면 된단다. 1주일 충분히 머물고 싶을만큼 매력적이고 편안한 곳이어서 진심 1주일의 시간을 만들고 싶어진다. 내 맘만 그런 게 아닌 듯 이구동성이다. 여행지가 주는 생경함의 매력, 맛있는 향토 음식, 또 함께 하는 이들의 궁합이 조화를 이루며 삶의 한 페이지 멋지게 장식했다.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노마드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더없이 좋으리라. 무심히 떠가는 구름이 부럽다.


- 2023. 4월 넷째 주 주말 여정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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