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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의 예술가 육코치 Jan 03. 2019

고도를 기다리는 시지프스 5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잃고 싶지 않았다

애당초 없는 캐나다 여권을 만들어낼 수 없었을 테니 내내 거짓말로 우릴 서울로 수지로 끌고 다녔다. 결국은 인천의 전처에게 맡겨둔 참이었다. 나는 여권만 보관하고 있으면 이 인간이 어쩌지 못하겠지, 도망갈려고 작정했으면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지. 새삼스레 그러지는 않을 거라고 나 자신을 설득했다. 오밤중을 다시 달려 인천을 향하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의구심이 일 때가 있었어도 사람을 의심하면 안 된다 생각했다. 어떤 경우에든 사람의 존엄을 존중하고 싶어서 차마 묻지 않았다. 그렇게 지켜주고 싶었던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그는 스스로 져버렸다. 그에 더해 사람을 악다구니를 쓰게 만들고 이렇게 험한 꼴을 보이게 했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나는 내내 꺼이꺼이 울어제쳤다.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나의 존엄마저 철저히 짓밟혔다. 희뿌연해진 시야와 흔들리는 핸들링,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다. 제 섧움에 겨운 나는 운전하는 내내 통곡을 했다. 운전석에서 내릴 기운조차 없어 동기가 대신 따라 들어가서 여권을 받아 나왔다. 깜깜한 골목 끝에서 불쑥 가느다란 손이 나오더란다. 동기가 말했다. 전처임에 틀림없다고......




그래,그러고보니 인천에 대해서 너무 상세히 알고 있었다. 마지막 주소지가 인천이었던 거다. 아이가 어렸을 때 이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캐나다 이민을 준비하다가 반려 당했다. 무작정 중동 쪽으로 일하러 나가서 십 여년을 보내는 동안 그의 존재는 이 곳에서 지워졌던 바다. 그가 읊조린 독백에 의하면. 그것도 사실일까? 진정이 된 나는 그렇게 말했다. 두바이 구좌에 돈이 있다며?그럼 얼른 돌아와서 아이에게 애비노릇이라도 하라고. 불쌍하지도 않냐고 십 여년 어떻게 삶을 꾸려왔을지 상상도 안 되느냐고. 부디 네가 말하는 게 진실이거든 네 가족들을 위해서 남을 삶을 살라고. 네가 네 부모에게 버림받고 그 원한 맺힌 그 마음이 어찌 똑같이 재현이 되어 버렸느냐고,어떻게 너는 네가 당했던 잔혹한 역사를 되풀이 하고 있느냐고. 나는 말도 안되는 훈계를 끝없이 늘어놓았고 그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네,네,네 연신 조아려댔다. 내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마음이 급해졌다. 주민등록이 말소가 되긴 했으나 외국국적이 아닌 것은 차라리 청신호였다. 주민등록을 되살려 3년 치 지역보험료를 지불하면 의료보험이 적용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응급상황으로 펼쳐진 일이었고 비록 신청기간은 지났으나 병원에서도 나의 딱한 상황을 헤아려 조치해주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전체 비용을 다 해도 1,000만원 내외로 해결 가능할 일이었다. 그런데 12월 29일이 하필 금요일, 밤중에야 자백을 받았던 상황이어서 당장 손쓸 수가 없었다. 여권을 받아서 보관하게 된 걸 위안으로 삼았다. 12/30 토요일,31일 일요일,1/1일이 공휴일,1/2일에야 조치 가능한 일이었디. 그런데 하필이면 내가 그날 오전에 기업 특강이 있었다. 고액이었고 갑자기 강사를 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친구들이 최종적으로 오겠다던 날이 1/2일이니 그날까지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여전히 믿었다. 동기가 급작스레 요르단의 파트너에게 전화를 넣었더니 틀림없이 한국으로 들어온다는 대답을 했다.




동기도 후배도 저 인간이 그 파트너들과 돈세탁을 하건 뭘 어쩌건 분명히 입국해야 할 일이 있는 건 틀림없는 듯하다. 도망갈 상황이면 진작 갔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고 다시 숙소로 데려다 줬다. 나는 이제 그를 못 믿겠다고 내내 도리질을 했으나 내가 지키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그 파트너들이 오면 오천만원 돈을 다 받아두자. 다음날 동행해서 주민센터에 가서 주민등록을 재신청하고 의료보험공단에 가서 조치하자. 수속이 끝나면 처리되는 날까지 돈을 보관했다가 일이 깔끔히 정리되고 나면 나머지 돈을 돌려주는 걸로 했다. 설마 이 정도 상황에 이르고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사람에게 다시 칼을 꽂지는 않으리라 믿고 싶었다. 매일 연락을 하거나 잠시라도 얼굴을 보며 1/2일 아침을 맞았다. 특강을 가기 전까지도 문자를 주고 받았다. 주민등록을 복원시키기 위해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특강 후에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특강이 끝나자 바로 문자를 했다. 응답이 없었다. 설마 설마하며 전화 통화를 시도했으나 받지 않았다. 아차 싶어 모텔로 전화하니 아침 11시에 퇴실했단다. 날랐구나. 결국은...... 




혼비백산 넋이 나간 나는 후배를 찾았다. 모텔로 병원으로 의료보험공단,대한법률구조공단 등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돌아다녔다. 그를 찾을 생각은 못하고 혹시나 구제받을 방법이나 일부 변제받을 방법은 없을지 쫓아다녔다.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고 그나마 소재지라도 파악하도록 경찰에 신고하란다. 고발하지 않는 다음에는 정보를 알게 되더라도 어떤 것도 알려줄 수 없다는 입장. 경찰서로 신고하러 갔다. 몇 단계를 거쳐 이층의 사무실로 안내되었다. 퉁한 수사관 앞에서 진술을 하는데 입이 말라 말이 잘 안 떨어졌다. 한심하다는 듯 큰소리로 취조하는 수사관이 너무 야속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책과 자괴감으로 견딜 수 없었다. 취조하는 분위기 상으론 덜 떨어진 여편네가 어떤 놈에게 꼬여서 돈 갖다 바치고 이제 와서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었다. 마치 연정이 불발된 듯한 분위기로 몰아갔다. 모욕감이 느껴져서 견딜 수 없었다. 후배가 대신해서 자초지종을 얘기하며 왜곡될 뻔한 사안들을 정리해줬다.




수사관이 다소 미안해하며 적극적으로 수사하겠다 했지만 나는 아무 소용없겠다 예감했다. 활시위가 이미 떠나 버린 사안임을 직감으로 알겠더라. 그래도 혹시나 해서 병원으로 모텔로 다시 되돌이를 했다. 매서운 바람 끝에 사람이 베일 수도 있겠다. 아니 차라리 베어버려 피라도 철철 흘리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냥 그 놈이 죽이도록 미웠어야 한다. 그런데 이 무슨 작난일까? 나는 내가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수사관이 여기저기 탐문하고 실마리를 찾나 했더니 모두 헛일이었다. 전화도 바꿨는지 송수신을 잡을 수 없다고 했고 다만 가족들을 만나 다짐만 받았다는 회신뿐이었다. 근 한 달은 정신 줄을 놓고 있었다. 우울과 공황 상태로 몸도 마음도 무너져 내렸다. 그냥 눈물만 흐르고 온 몸이 아파왔다. 5년 전 쯤이기만 했어도 사는 게 그래도 자신이 있었다. 그저 사람 목숨 하나 살렸다 생각하고 통 크게 접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필 지금,내가 인생에서 가장 위기의 순간을 겪고 있는 이 때였는지? 그런데 테잎을 몇 번이나 되돌려 감아 봐도 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같은 깊은 절망. 그가 아닌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어도,나는 똑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나는 내가 정말 혐오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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