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의 씨앗을 심으러

100-6 진성리더를 찾아서 EP4. 퇴계의 현대적 부활

"所願善人多 소원은 착한 사람이 많은 것이다"


당시 세상을 말세라 여겼던 퇴계는 자신 먼저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솔선수범하는 삶을 살겠다고 작정한다. 참된 선비 혹은 참된 어른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고향에 돌아와 도산서원을 세워 후학을 기른다. 목적의 씨앗을 파종하던 그 순간, 그는 어떤 모습을 그렸을까? 그는 자신을 위해서 무리짓는 것도 원하지 않았고 추앙하는 세력들을 경계했다. 대부분의 고관대작들이 다 가진 행장조차 만들지 못하게 했다. 제자들에게조차 함부로 하대하지 않았으며 敬으로써 존중과 환대의 삶을 살았다.


첫 부인이 죽고 30살이 넘어 재혼을 했는데 권씨 부인은 정신이 약간 모자란 사람이었다. 제사 예법을 제대로 지킬 줄도 몰랐다. 제삿상을 준비하다가 밤이 바닥에 떨어지자 그걸 줏어 먹었단다. 온 집안 사람들이 기막혀하며 힐난하는데 퇴계는 조용히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이유를 먹는다. 먹고 싶었다고 답하는 부인에게 다음에 또 먹고 싶으면 자기에게 말하라면서 나무라지도 않고 잘 타일렀다. 기묘사화의 여파로 몰락한 집안의 과년한 딸이 정신마저 온전치 않으니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그녀를 돌보지 않을 것 같아서 재취로 맞아들였다는 일화. 퇴계의 긍휼감을 충분히 알 만한 대목이다.


퇴계선생의 도산서원선비문화원으로 진성리더 1박2일 수련을 왔다. 문화원의 밥도 맛있었고, 탐방 코스도 좋았다. 수련생이 100만을 돌파했다더니 그럴만 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올해 80이라는 김병일 이사장님은 흰 두루마기를 정갈히 갖추고 우리 일행을 맞아주셨다. 눈빛이 형형하니 예사롭지 않다. 16년째 문화원의 이사장으로 봉직하면서 해설사역을 자처하기도 하고 강사가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퇴계의 선비 정신을 전파 중이다. 지도 위원이라는 분들이 탐방 내내 동행하시는데 우리를 대하는 태도에 품위와 존중이 그득하다. 저절로 두 손을 모으게 만드는 어조와 온화한 미소, 정성스러운 해설 등 감동적인 모습이다.


알고보니 191명의 지도 위원이 있대는데 대다수 전직 교장이나 교육장 출신의 지성인들로서 퇴계 사상에 경도되고 이사장님의 강의로 퇴계 다시보기로 삶의 후반부를 멋지게 꾸려가는 모습이다. 좋은 어른들의 후반 인생을 보여주는 듯해서 보기좋다. 새벽에 기차타고 이곳엘 오는 내내 설레임과 기쁨으로 온다는 말씀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내면에서 끌어올라오는 흥이 고스란히 드러나서 보는 이도 에너지를 얻는다. 이육사 문학관으로 이동 중에 비가 갑자기 쏟아졌다. 날이 너무 좋아 예상도 못했는데 차 트렁크에서 우산마저 준비해준다. 예상치 못한 서비스에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퇴계 선생의 17대손 이근필 종손을 뵈러 종가댁에 인사를 갔다. 귀는 전혀 기능을 못하신다는데 최선선을 다해 지혜를 나눠주셨다.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아마 인사만 받고 얘기는 못 나누실 거라 했는데 기꺼이 맞아 주셨다. 리액션을 잘하고 진지한 진성리더십 회원들을 보니 마냥 신이 나셨던 모양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윤정구 교수님은 기억하고 계셨고, 엄마가 될 여성들을 교육하는 교수라고 특히 좋아하셨단다. 엄마들이 변해야 자녀들이 바뀌니 가장 중요한 교육이라고 생각하신다. 우리들에게 특별히 <미래교육>이라는 책을 추천해주셨다. 92세의 말끔한 선비는 최선을 다해서 복을 짓고 계셨다.


하루에 조복(造福 : 복을 짓다)이라는 글자를 200장을 붓글씨로 써서 방문객들에게 선물로 주신다. 복을 구하고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복을 지으며 살자는 선생은 은악양선(隱惡揚善 : 남의 허물이나 잘못은 감춰주고 선함을 드러내다) 운동도 벌이고 있다. 한 사람에게라도 그 뜻이 전해져서 선을 추구한다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지지 않겠느냐? 정말 기쁜 마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매일 쓰신단다. 저절로 고개가 떨궈진다. 고택에서 종손을 보좌하는 이들이 몸에 밴 겸양과 헌신의 태도도 인상적이었다. 그저 공경하는 마음만이 전해져왔다.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우리가 맘에 드셨던지 오래도록 말씀을 하셨다. 레비나스가 얘기한 '얼굴성'이 내내 생각이 났다.


저녁 식사 후 다시 이어진 김병일 이사장님의 강의에서 인간 퇴계 이황 선생님의 면모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정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역사적 고증을 들으면서 한 사람의 삶을 이룬 사상이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잘 보게 된다. 시대는 급변하고 인류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AI와 한판승부를 겨뤄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면 인간의 경쟁력은 무엇이 될까? 창의적 사고와 바른 인성, 흔들림 없는 목적적 사명감이 절대적 차별점이 된다. 책읽기를 성인 대하듯 경건함을 잃지 않고 사람 대하기를 언제나 경으로써 진심을 다해온 퇴계의 삶은 무위의 가르침이다. 그 스스로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실천의 삶으로 삶의 방향을 보여주고 삶의 비전을 드러냈다.


독립운동가 이육사가 탄생할 수 있었음도 퇴계 선생과 그 후손, 후학들이 일궈온 비옥한 토양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집안에 내려오는 문집을 통해 조상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조부모가 부모가 보여준 삶의 길을 자연스레 받아들인 그들은 목적의 씨앗을 파종할 수 있었다. 한 마을 사람들이 전부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니. 가치관의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누군가의 목적이 내재화된 삶으로 품성이 되어 주변 사람들을 감화시킨 셈이다. 그런 어른들을 가진 곳에서 더 큰 목적이 탄생하는 건 당연할 터.


일행들은 모두 마음이 뜨거워져 질문이 이어졌고 각자의 결의들이 표현되었다. 공식 강의가 끝나고도 토론은 이어졌으며 이사장님까지 참여하셔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셨다. 퇴계가 말한 '착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지 질문을 품었다. 때로는 이익에 반하는 무엇이기도 할 것이고, 때로는 마음 바탕에 품고 있는 선한 본성일 수도, 어쩌면 플라톤이 얘기한 이데아의 선일 수도 있다. 단지 악에 대조를 이루는 의미만은 아님을 안다. 내 안에 있는 선은 때로는 가능성으로 드러나기도 할 테고 때로는 최고의 탁월함이 되기도 하리라. 시대가 품은 맥락에 따라 선의 개념도 달라지겠으나 우리 인간에게는 본디 선함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졌음을 잊지 않는다.


이미 내면에 있는 선한 씨앗을 발견하는 일, 발견자로서의 나는 의미를 부여하고 실행하는 주체이다. 스스로일어서서 바름을, 아픔을 함께 건너는 진성인. 퇴계 이황은 진성인이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도반들은 각자의 삶에서 어떻게 퇴계를 살려낼 것인지 궁금해진다. 목적의 씨앗을 뿌리는 도반들이 있다는건 든든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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