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말이었다. 진성아카데미의 10여명 도반들과 흥미로운 번개를 했다. 영화 <다음 소희>를 보고 리뷰 수다 떨기. 이 영화는 세계적인 호평을 받고도 관객 동원 10만을 겨우 넘어 흥행은 참패했다. 다행이 의식 있는 단체들에서 릴레이식으로 따로 상영제를 열고 있는 것을 SNS 상에서 봤었다. 정주리 감독을 초청해서 좌담회를 나누는 장면은 흐뭇했다. 압구정의 한 퓨전 주점에 모여든 우리들은 입으로는 먹는 즐거움, 눈으로는 레비나스의 ‘얼굴성’을 확인하고, 귀로는 서로가 내는 내면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이 작품은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 국제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되었다. 상영 후 7분 간의 기립 박수로 극찬을 받았다. 이 영화는 실제 LG U+ 계열 하청업체인 전주 콜고객 센터에서 벌어진 일을 모티브로 했다. 현장 실습생으로 계약 해지 방어 상담 업무를 하던 홍수연 고등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은 청소년 노동 현장의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제목이 극명하게 시사하듯, '다음'이란 사회 시스템 안에서 팀원들을 지켜주지 못한 팀장이 자살하고, 잇달아 이어진 소희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겠고, 어린 날의 비슷한 상처를 가진 경찰관 유진을 뒤이은 소희라는 의미도 되겠다. 또 이런 고리가 중단되지 않고 반복되는 구조 안에서 다음은 내가, 내 자녀가, 내 친구가 될 수 있는 건 아닌지 묻는 거 아닐까? 남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규칙과 인센티브를 내세워 청소년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괴물들은 유연하게 숨어버렸다. 이 괴물을 숨겨주느라 급급한 다양한 층위의 어른들. 하나같이 찌질하고 비루함을 시전한다. 학생들의 취업률로 자신의 생존과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담임샘, 팀원을 지켜주지 못해 죽음으로 대신한 팀장, 눈 가리고 아웅하며 책임에서 멀어져있는 학교 관계자들, 죽은 팀장의 뒤를 이은 여자 팀장의 은근한 회유, 소희가 힘들어하는지조차 눈치 못챈 아빠. 알고도 모르는 체한 엄마. 부끄러운 초상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들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쏠 수 없었다. 그들의 자리에 자신들을 대입한들 달라질 자신이 없었기로ᆢ우리 모두 부끄러웠다. 어린 친구들이 그렇게 스러져가는 걸 몰랐던 죄, 연대해서 끽 소리라도 못하고 모른 체한 죄, 주위를 환기하려는 노력조차 보지 않은 죄, 죄투성이였다.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으연 좋을 텐데ᆢᆢ 그런 일을 한다고 더 무시해. 아무도 신경을 안 써. 그러면 완전히 혼자가 돼."
소희의 죽음을 규명하려는 경찰관 유진의 말. 댄스 학원에서 만난 적이 있던 소희를 진작 더 관심가져주지 못한 죄책감이었을까? 핏기없이 웅얼대던 유진의 독백이 아프다.
소희가 남긴 휴대전화기에 유일하게 담겨 있는 동영상.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담은 거였겠지? 몰입해서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이 생에 마지막 남기는 모습이고 싶었을 테다. 자기가 떠난 자리에서 다시 광대가 되고 싶지 않았던 소희는 그저 삶을 뜨겁게 살다 간 존재이고 싶었나보다.
<가버나움> 영화이야기도 곁들여지고,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에 대한 윤리성을 잃어버린 사회의 부조리함을 원망했다. 그런 한편 그 원망이 부메랑이 되어 스스로를 찌르고 있음을 고백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난 우리는 무얼 할 수 있을까?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불편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우리가 영화관을 대관하고 한사람씩 초대하여 한사람이라도 더 알도록 하자고. 모두들 흔쾌히 동의했다.
준비위원들이 자진해서 구성이 되었다. 극장과 강당, 영화배급사 등을 수소문해서 7/22일 토요일 상영회를 열게 되었다. 여름 휴가철임을 감안하여 40명을 한정했는데 진성 아카데미 회원들에게 올리자마자 하루만에 정원을 넘어섰다. 그랬구나. 팔짱을 풀고 연대하자니 저절로 풀려가는구나. 아침에는 더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우리가 움직이는 취지와 의미를 이해한 대전의 한 회사 대표가 직원들 100명에게 보여주겠다고 정보를 구하는 연락이 왔다. 단톡방에 소식을 전하자 모두들 기뻐했다. 그래, 이거지. 나비의 날개짓이 태풍을 불러오는 거지.
리더십은 영향력이다. 영향력은 사람들에게 끼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다. 권위는. 자신이 세우는 게 아니라 타인들이 세워주는 것처럼.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몸짓이 누군가에게 공명을 일으킨다. 공교롭게도 영화 번개일에 맞춘 강의 요청이 들어왔다. '직장 내 괴롭힘과 인권'을 주제로 한 내용을 원한다고. 학회 도반들이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 나는 강의를 통해서 <다음 소희>를 들려주련다. 팔짱을 푸는 일이 어떻게 빗장까지 열게 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책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
정주리 감독이 도희를, 소희를 소환해주길 빌어야하나? 아니,아니 다음 도희,소희를 부를 일이 없길 바래야지. 정주리 감독 역시 그걸 바랄 거라고 굳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