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에 손작가님이랑 만나 서울로 향했다. 노원구 더숲 문화복합공간. 이런 신개념의 공간이 있었구나. 베이커리 카페 + 갤러리 + 영화관 + 서점을 한 공간 안에 모아두었다. 문화 코드를 이리저리 직조해서 자유로운 동선으로 문화와 예술을 노출시킨다. 누구의 시선에도 구속되지 않고 원하는 상태로 있기.
영화는 거의 순수예술 영화들로 매니아들을 위한 콘텐츠다. 작가님의 지인 모녀가 1,2층 나눠서 전시회를 하고 있다. 어머니인 김승민 작가와 딸 김미기 작가. 제주에 살면서 제주를 모티브로 엄마는 반추상화, 딸은 구상화로 표현했다. <풍경 하나>의 엄마는 제주의 정체성을 빌어 끊임없는 자아탐색을 하고 있는 듯했다.
일렁이는 제주의 파도, 몰아치는 바람, 어느덧 제주의 상징이 된 수국의 명랑한 수런댐을, 외따른 섬마을에 기꺼이 고립당하기로 한 듯한 알록달록한 나의 집. 풍상을 견뎌낸 고사리들의 약진. 삶의 전장에서 흐르고 흐르는 작가 자신 분아들의 총합인 듯 일렁이고 일렁인다.
반면 딸인 김미기 작가는 비교적 평온한 제주바다의 윤슬들을 담아내고 있다. 바다라고 같은 모습이 아니듯 이르는 곳곳의 빛깔이 따로 있다. 그녀가 보는 인생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바디일까? 격랑을 숨긴 채 평온을 가장하고 있을까? 찰랑찰랑 목에 숨이 차기까지는 삶의 실감을 드러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모녀 각자의 시선으로 끌어 안은 제주.
화가들이 변화무쌍한 지금의 심상을 그려내듯 내가 삶을 담아내는 시선도 가지각색이다. 과거의 내가 보던 그 시선과 오늘 내가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 바라보는 시선 뿐일까? 내가 전할 메시지에도 나의 개념과 받아들이는 상대의 개념 차이가 존재한다.
아침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현주야,네가 지난 번에 '나는 착하지 않아'라고 했던 말이 오래도록 생각났어. 내 생각에 너를 사십년 봐오면서 진짜 착한 사람이라 여겼는데 네가 안 착하면 누가 착할 수 있니? 나는 이제 남녀를 불문하고 착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 달전 쯤 나누던 대화에서 했던 말을 두고 오래도록 생각의 화두로 잡았던 모양이다. 나는 친구가 생각하는 착함과 내가 말한 착함이 같은 개념이었을지를 확인해야했다. 그녀가 지칭하는 착한 사람은 너그럽고 인자한 사람, 올바른 사람이었고, 나의 해석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순한' 사람을 지칭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같은 단어를 두고 화자와 청자 간에 그리는 마음의 지도에 따라 전혀 다른 여정을 걷고 있음을 확인했다.
해석에 대한 정의, 마음의 틀인 각자의 지도, 신념화된 자아틀의 모형에 대해 오래도록 통화를 했다. 자신의 사례로 들여다보면서 자기인식이 얼마나 어려운지 토로했다. 결국 우리는 이 모든 의문과 감정의 고리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배울 게 있음에 동의했다. 오로지 모른다는 것만이 명징한 진실. 그래서 내가 지치지 않도록 비난 이전에 자기수용으로 탐색의 길을 가야 한다고ᆢ
우린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비슷한 얘기들로 그간 탐색한 자기보고서를 내놓겠지? 친구가 물었다. 넌 어째서 자기처럼 팔딱이지 않고 컨트롤이 되는지를. 나 역시 수시로 팔딱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가엾은 존재다. 다만 그런 상태에 대한 알아차림과 사후관리에서 이제 나를 비난하거나 몰아치지 않을 뿐. 스스로 찾아갈 수 있을 때까지 차근차근 길을 알려주는 것.
나이 60에도 여전히 마음의 지도를 어떻게 그려가야할지를 허둥댄다. 그게 인간이다.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노원구에서 인사동으로 넘어갔다. 몇 군데 전시회를 돌면서 생각을 쉬게 했다. 글씨로, 아크릴 물감으로, 자수로, 염색으로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예술가들의 다양성의 변주. 각기의 고유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보편성을 지닌 존재들. 자기만의 마음지도를 그리고픈 욕구를 허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