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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의 예술가 육코치 Jan 07. 2019

고도를 기다리는 시지프스 8

허공에 삶을 짓다

과부하가 걸릴 때면 엄마나 가족들에 대해 양가적 감정이 불쑥 올라왔다. 정체성의 혼란을 피하느라 친구에게 집착하기도 하고, 그럴듯한 명분을 스스로에게 걸고 이타주의에 열광하기도 했다. 천사 콤플렉스로 친구들의 환심을 사고 사람들이 떠나지 않도록 연기하기도 했다. 이방인으로 소외되고 싶지 않은 불안감과 외로움은 절대적인 소속감이라는 울타리가 필요했다. 정신분석학에서 얘기하는 반동형성이었으리라. 그 안에서 궤변과 개똥철학을 읊으며 ‘유사리더’로 자라나고 있었다. 언제나 상대에게 배려하고 양보하는 걸 당연히 여겼다. 상대가 보이는 반응은 언제나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으니 배신감과 서운함으로 인간관계에 회의를 느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색을 일부러 피했다. 무늬로만 무리들의 리더가 되려고 했다.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악순환이 거듭되는 건 너무도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자신감있게 무슨 일이든 잘해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적인 자리나 혼자 있을 때는 한없이 나약해져서 남의 눈치나 살피고 있었다. 어지간한 일은 상대에 맞추고 배려한 것이라고 스스로 속였다. 자기주도적 삶을 살지 못하는 나는 그렇게 병들어 갔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중국어 학원을 열었다. 운이 좋게도 학원은 성황을 이루었다. 사람을 향한 열정과 책임감은 진정성으로 비쳐졌다. 입소문만으로도 쏠쏠한 수입을 챙겼다. 이제 경제적으로도 독립을 하고 과거의 우울을 떨칠 수 있으려나 했다. 기다렸다는 듯 거듭되는 시련. 엄마가 빚보증을 섰는데 채무자가 도망을 가버린 상황. 우리를 위해 유난히 희생적이었던 엄마,불쌍한 엄마. 나는 신뢰를 목숨만큼 귀히 여기는 엄마를 구해주고 싶었다. 그 큰 빚을 몇 년에 걸쳐 청산하며 돈에 대한 철학을 일찌감치 세웠다. 병든 나에게 주는 선물이 여행이었다. 주말이면 이곳저곳을 다니며 내면의 끊임없는 자유를 누렸다. 유일한 숨통이자 사색의 통로를 걷던 시간이없었으며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았을까? 젊은 친구가 중국어 학원을 제법 그럴싸하게 운영하고 있으니 여기저기서 맞선을 주선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러나 천형을 타고 난 이력은 아픈 기억들만 선물로 가져다주었다. 


온전히 나라는 사람 하나로 평가되지 않는다는 것을 새길 일이 수시로 벌어졌다. 그들은 내가 궁금한 게 아니라 내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지,엄마는 뭐하는 사람인지,집은 어디인지,형제는 멀쩡한지.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들 속에서 나는 숨이 막혔다. 나는 원치 않는다고, 네가 좋다고 했지,내가 널 붙잡은 적 있니? 네 부모가 분명히 그런 질문들로 나를 혹은 너를 괴롭히게 될 거라고 수없이 말했잖아, 그래서 나는 누구랑도 결혼 않을 거라고 했잖아? 많이 억울하고 많이 속상했다.  스스로 지레 겁을 먹고 호감을 표하는 사람들조차 기피하기도 했다. 그렇게 고사해도 몇 차례 마주친 상황은 우려대로 상처를 입는 일로 이어졌다. 죽자 하고 따라다녔던 선배의 가족들이 보인 행태로 사람에 대해 깊은 절망감을 맛보았다. 대구라는 지역의 보수성과 횡포가 고스란히 드러난 그 사건들을 통해서 덮어두고 있던 상처가 다시 올라왔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던져진 내 가족의 ‘인생’이, ‘저주’가 몸서리쳐졌다. 결정적으로 아버지 본가에서 한 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우리 모녀에게 불똥이 튀어 가슴을 헤집어 놓는 일이 있었다. 군소리 없이 쥐죽은 듯 살아왔는데 그마저 가만히 안 두냐고 부모를 원망하고 삶을 저주했다. 나는 서울에서 일을 도와달라는 동창의 제의에 그 즉시 수락하고 줄행랑을 놓았다. 진작에 떠났어야 했다. 3류 영화 연속으로 찍기 전에.


더 이상 얽히지 않으려면 진정한 독립을 해야 했다. 호적에서 완전히 분리가 되어야 그 악연의 고리가 끊어질 듯했다. 분심을 가슴에 가득 채운 나는 바보 온달을 찾았다. 한 번은 남보란 듯이 살아야 한다고,그게 복수라고 생각했다. 당시 한국통신이라는 괜찮은 직장을 다니고 있었던 한 남자와 서울에서 결혼을 했다. 남편은 대학을 다니며 못다 이룬 꿈인 고시 공부를 하고파 했다. 평강공주가 될 자신이 있었다.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뒷바라지를 자처한 8년. 결혼은 또 하나의 덫을 마련했을 뿐이었다. 남편은 아무런 소득도 없지 못한 채, 결혼후 4년 째 태어난 아이가 6살이 될 때에야 취업을 했다. 그 사이 언니가 보험회사 소장으로 있으면서 대형 금융 사고를 쳤다. 언니는 도피성 결혼이 파경에 이르러 일을 시작했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했던 일이 기어이 일을 내고 말았다. 달러 사채까지 손을 댄 언니는 부채 감당을 못해 죽을 결심을 하고 있었다. 뒤늦게 친정집을 팔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나 힘에 부쳤다. 사고뭉치 언니에게 엄마는 장애인 오빠와 함께 셋이 동반자살을 하자고까지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 하나라도 온전히 살도록 쓸모없는 자신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언니는 개인 파산 신청을 하고도 해결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언니의 채무를 몇 년에 걸쳐 내가 갚아 나갔다. 죽을 병 걸린 가족 수술비를 감당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다잡아먹고 씩씩하게.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소중한 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더 컸으므로.


나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후 1시부터 밤 10시 30분까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결혼 초 학습지 선생님을 하면서 어린 친구들을 만났다. 그때 겪은 학부모들의 신뢰가 바탕이 되어 논술 선생님으로 지역의 신망을 얻었다. 입시 형이 아닌 가치관 논술로 인성을 다듬고 개개인의 성장에 초점을 두었기에 장기적인 교육이 가능했다. 척박한 지역이었으나 소통과 공감을 전제로 진심을 다했다. 그런 태도 덕에 학부모들의 전폭적 지지를 얻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부모들의 코칭과 교육으로도 이어졌다. 일 외에는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갚아야 할 빚청산과 아이의 양육에 매달렸다. 남편은 자신이 그리던 그림을 완성할 수 없었던 일에 좌절하여 자기학대를 시작했다. 자신과는 달리 아내는 승승장구 타인의 신망을 얻고 있는 모습이 불편했다. 돈도 자신의 몇 배를 버니 이리저리 자신이 설 자리를 잃어갔다. 외로움과 더불어 자기 비하가 시작되면서 술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나는 맨 손으로 시작하여 학업 뒷바라지에 집을 사는 일에까지 시댁으로부터도 한 푼 지원 없이 꾸려나갔다. 그런 중에도 ‘돈’을 이유로 바가지를 긁거나 어떤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것만큼 치사할 일은 없을 것이어서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떤 것에도 기여한 바가 없었던 그는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음주 후 주사가 시작되고 언어폭력이 이어졌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돌보거나 챙기는 일도 하지 않고 겉돌았다. 아빠 자리를 지켜주고 싶었던 나는 꾹꾹 눌러 참기만 했다. 시간이 조금 필요할 테니 기다려주자 싶었으며 매일 펼쳐지는 일에 치여서 나를 지탱하는 일도 숨가빴다. 아이 앞에서 부정적인 모습을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허물을 덮으면서 혼자 속앓이를 시작했다. 남편은 한 번 꼬이고 뒤틀린 마음이 좀체 풀리지 않고 음주 후 주사는 더욱 강력해져갔다. 술 취한 사람의 언어폭력을 고스란히 감당하던 나는 점점 자존감을 잃고 우울해졌다. 삶은 여전히 거듭되고 살아내고 치러내야 할 몫들은 어김없이 목을 조여 왔다. 몇 년을 견디다 드디어 둑이 터지듯 나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남편이 택시강도를 만나기도 했던 터라 귀가하는 걸 확인하기 전에는 잠들 수 없었다. 불면증에 시달렸지만 항시 사람을 상대했어야 하는 나는 이중적 기제로 삶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결국 어느 날 울분이 엉뚱하게 전이 되었다. 학원을 안 가겠다고 버티는 아이에게 야구배트를 휘두르려는 자신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평생 욕설 한 번 들어본 적도, 한 적도 없었던 내가 악에 치달아 이성을 잃어갔다. 나는 내가 가여워서,또 아이가 불쌍해서 오래도록 무너져 통곡을 했다.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로서의 책임은 다해야겠다고 작정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버티고 살아내야 했다. 오빠는 장애인으로 평생 혼자이고,언니마저 재혼 후에도 순탄한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엄마에게 자식들 중 하나는 ‘정상적’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차마 ‘이혼’을 입 밖에 담지 못하고 내색도 못했다. 나는 그가 이혼을 원하는 순간이 오면 좋겠다고 빌었다. 그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내뱉어졌을 때 차라리 고마웠다. 그러나 아이를 방패로 이내 번복하며 자신이 편한 상태를 유지하려 했다. 누구에게도 토로하지 못했던 나는 죽을 것 같아서 결국 별거라도 요청했다. 빚 갚는 일이 마무리 되어가서 이제 좀 허리를 펴려나 싶은 즈음에 또 경제적 시련이 시작되었지만 비로소 밤에 잠이라도 잘 수 있었다. 삶 중에 일반적인 ‘정상적’인 형태에서 비껴 산 사람의 고충은 곳곳에서 발현되었다. 별거 상태로 산다는 게 떳떳할 수 없으니 다시 비밀 주머니를 차고 조마조마한 삶을 지탱해나갔다. 남의 자녀들의 인성과 품성을 다듬는 일을 한다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더더욱 떳떳한 처지로 있어야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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