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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의 예술가 육코치 Jan 07. 2019

고도를 기다리는 시지프스 9

툭 하고 끊어져 내렸다. 탯줄이.

   

나는 죽으라고 일을 하며 현실을 헤쳐 나갔다. 언니의 빚 청산에 대구 집 두 개가 날아갔다. 엄마와 오빠를 인천의 우리 집 옆으로 모셨다. 실제적 가장이 되어 두 집 살림을 책임져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에 대한 원망이 없었다. 엄마는 아이의 양육과 살림 살아주는 일을 전담하고,오빠도 일체 짐이 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현실은 척박해도 나는 언제나 나를 지지해주는 원 가족들로 해서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렇게나마 살아가도 충분했다. 그런데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살림을 전담하던 엄마가 무리를 하셨던지 심장과 신장에 병이 났다. 심장 판막 치환 수술을 다시 해야 해서 입원을 했다.  나는 두 달 여를 아예 일을 작파하고 엄마의 병상을 지켰다. 그러나 지킨게 아니라 짜증의 산만 높여갔다. 병실의 문쪽 간이 침상은 수시로 들락거리는 사람들로 인해 한 시간을 푹 잘 수 없는 구조였다. 긴 병으로 간 것도 아니었는데 잠을 못자는 고통이 사람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겨우 잠들다 설핏 눈을 뜨면 엄마도 잠을 안 자고 망연히 앉아 있곤 했다. 그때 알아봤어야 했다. 엄마는 이미 입원했던 그날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심장수술을 위해선 치과 치료가 선행하느라 한 겨울 무리하게 강행한 것이 화근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으나 노인들이 치과 치료 후에 충격으로 치매에 걸리는 확률이 크다고 했다. 일주일에 나흘,이 주일 간 진행된 치과 치료 중에 엄마는 수시로 헛구역질을 하고 고통을 토로하셨다. 나는 내가 해야할 일에 대해서만 골몰했지 그 고통의 크기가 얼마만할지 헤아리지 않았다. 치과 치료가 끝나고 한 달 이상을 입원해서 수술을 준비했으나 다른 합병증들이 나타났다.  수술할 수 있는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아서 내내 전해질 발란스를 맞추고 신장 치료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엄마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져갔다. 얼마나 총기가 있었는데 빛을 잃어가는 게 훤히 보였다. 컨디션 회복도 안 되자 의사는 최종 판단을 내렸다. 수술을 억지로 강행할 수는 있으나 심장은 원 상태로 돌린다 해도 아예 입원해서 신장 투석을 내내 받으셔야 하는 상황이고, 수술 자체에 대한 위험성이 커서 권하고 싶은 상태가 아니다. 회복이란 그저 심장을 살리는 의미 외에는 크게 없을 수 있다는 결론.


엄마는 의료보조기를 밀면서 겨우 움직였는데 급기야는 변을 수시로 지리기 시작했다. 금세 옷을 갈아입히고 샤워를 시켜 누여 두면 또 싸고. 엄마에 대한 걱정보다는 새 환자복을 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미안해서 간호사에게 눈치를 보고 있는 나 자신이 참 비겁하고 못나 보였다. 기저귀를 차자 소리를 하고픈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차마 입으로 뱉지는 못했다. 나는 혹시나 엄마가 알아서 기저귀를 차겠다 자진해주길 기대하며 기저귀를 사서 머리맡에 두기도 했다. 나는 참 모진 딸이었다. 우리 엄마의 성정 상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텐데,내가 편하고 싶어서 꼼수를 부렸다. 엄마는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억울했을까? 평생을 자식들 앞에서도 맨발을 안 보이고 정갈하게 사셨던 양반인데 이런 푸대접을 받자니 기가 막혔을 테다. 하루에 몇 번씩, 걸어가며 똥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모르고 보조기를 밀고 가는 엄마. 엄마의 뒤를 따르며 부끄럽기도 하고 가슴이 터질 듯 맘이 아픈 양가적 감정에 시달리며 자신을 자책해야 했다. 어느 날 엄마는 진지하게 말을 건네셨다. 수술을 하건 안 하건 퇴원하면 이제 집으로 안 돌아간다. 너를 더 괴롭힐 수 없으니 오빠와 함께 들어갈 요양원을 알아봐달라는 게 요지셨다. 당신이 가실 길이 오래지 않았다는 걸 예감하셨던 걸까?


수술여부에 대해 내가 결정할 수 없었다. 엄마의 생사여탈권을 내가 쥐고 싶지 않았다. 아니 솔직하자면 엄마가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의사가 말한 그대로 엄마에게 말씀드렸다. 엄마의 극심한 고통을 지켜보는 일이 두려웠다.  자신에 대한 '존엄'의 상태를 어떤 가치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도 엄마에게 선택권을 주고 싶었다. 엄마는 기저귀를 차야 하는 상태로 병상에 누워 신장 투석을 하면서 버틸 양반이 아니란 걸. 존엄이 무너진 모습을 견디지 못하시리란 걸 잘 알았다. 역시 수술을 하지 않겠다 하셨고 당장 요양원을 찾아 달라셨다. 수술을 하지 못할 바엔 더 이상 병원에 있을 필요없다고 의사 선생님에게 퇴원명령을 빨리 내려 달라고 사정하셨다지. 난 공모자가 되어 짐짓 모른 체 하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빨리 빨리 나길 은근히 기대했음이 틀림없다. 난 철저하게 이기적인 짐승이었다. 두 달째 들어서며 내 몸에도 이상 징후들이 보여서 극도로 예민해져서 신경의 돌기가 온통 날을 세우고 있었다. 오만상 얼굴을 찡그리고 겨우 잠들어 있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계시던 그 모습.


아는 선배의 요양원에 모셔갔다. 일산까지 오가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필 차를 처분했던 상태라 매번 그 차를 렌트하며 일산과 인천을 오갔다. 처음 일주일은 잘 적응하는 듯,원장님,요양보호사님들 다 너무 잘해주고 친구들도 너무 좋다고 들떠서 한참동안 전화기를 붙들고 계셨다. 참 다행이다 싶어 죄책감을 씻기 바빴다. 기쁨도 잠시, 2주가 지나지 않아 엄마의 이상행동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잠도 자지 않고 요양원 사람들을 괴롭히고 오빠를 못살게 굴기 시작했다. 평생 남에게 눈 한번 흘겨본 적이 없는 엄마가 당신을 통제하려 드는 사람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119에 전화를 해서 당신이 감금되었으니 빨리 구조해달라지 않나,혼자 탈출을 감행했다가 길을 잃기도 했다. 아이에게 전화를 해서 할머니 구출하러 빨리 오라고,엄마나 이모에겐 말하지 말고 빨리 데리러 오라고, 원정이 학교 앞에 방 얻어서 원정이 세 끼 밥 차려줄 테니,너랑 나랑만 비밀로 하자고.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 원정아 원정아를 부르셨단다. 일하고 있는 언니에게도 수시로 전화를 해대었다. 어느 날엔가는  당장 가죽 소파 두 세트를 사오라고 호통을 쳤다. 집요하게 이틀동안 몇 차례나 요구를 해오기에 엄마가 원하는 가죽 쇼파 두 세트를 사서 요양원을 방문했다.


그 요양원에는 형편이 좋은 분들이 많으셨던지 자식들 자랑에 여념이 없었던 모양이다. 별을 달고 있는 자제도 있고 교수 자제 있는 분도 있어 이리저리 자랑이 끊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당신 생각에 병신 자식까지 데리고 요양원에 들어와 있는 처지를 누가 업신여기기라도 한다고 단정했다. 뭐라도 자식을 통해서 위세를 보여야 했나보다. 그런 엄마의 마음은 알 길 없었던 나는 엄마가 정말 야속했다. 소파를 들이고 난 후, 엄마는 무슨 권력이나 잡은 듯,아무나 자신의 소파에 앉게 하지 않으셨단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기꺼이 앉으라고 권했으나 미워하는 사람에겐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시더란다. 그 소파로라도 당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던 그 마음, 자랑조차 경계하던 양반이 어떤 설움이 복받쳤기에 그런 행동을 했을지 가슴 시리다.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고 있던 중이라 이것저것 다 너무하다 싶어 원망이 절로 일어났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엄마는 다음에는 방마다 미니 냉장고를 들여놓으란다. 오빠에게 준 우유를 제때 안 먹어서 상했던 모양이다. 그걸 오빠가 먹고 배탈이 났었더니 저런 요구를 하셔서 안된다고 했단다. 엄마는 처음에는 직원들을 회유하다가 말을 들어주지 않자 불같이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댔단다. 요양원에서는 어떻게든 적응하실 수 있도록 전화를 받지 말라고 했다. 번호가 찍힐 때마다 내 죄가 또박또박 새겨지는 듯. 가슴이 울렁이고 숨이 가빠졌다. 세상의 이목에서 평생 자유롭지 못했던 엄마는 세상을 향해 짐승처럼 포효했다. 결국 잠시라도 집에서 좀 진정해서 와야겠다고 일시 외출 조치가 내려졌다. 집으로 다시 모셔왔다가 들어갔다를 반복하면서 처음으로 나는 엄마에게 지독한 미움을 받았다. 


평생 유세를 떤 나에게 복수라도 하려는 듯 전혀 딴 모습을 보이셨다. 한 숨도 자지 않고 눈동자는 퀭해진 상태로 집안 곳곳을 헤매고 다니다가 가만히 새우몸을 해서 웅크리고 있다가. 거실 한 복판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다가,레이저 광을 쏘듯 나를 쏘아보며 미워하다가. 어느 날엔가는 베란다 창을 당장 물청소를 하란다. 기가 막혀서 호스를 끌어다가 창을 씻어내리는데 나도 모르게 통곡이 나왔다. 엄마는 내내 나를 쏘아보며 깨끗이 더 빡빡 씻어라며 내내 웅얼거리셨다. 큰 창에 팔을 뻗어 붙어서서 꺼이꺼이 울었다. 두려웠다. 괴물이 되어 버린 우리 엄마가 가엾기보다 무서웠다. 그런 한편,정신이 돌아오면 엄마는 스스로를 용서 못하실 거란 걸 알아서 그렇게 아팠다. 엄마,엄마.엄마. 매순간이 지옥 같던 시간들. 그러나 내 내면으로는 면죄부가 주어지는 듯 차라리 속 시원하기도 했다. 내가 엄마에게 부렸던 횡포가 오죽했을까? 꼴난 돈을 벌고 빚을 갚아줬다는 유세를 알게 모르게 했을 것이며 남의 부모,남에게는 그렇게 착한 사람인 척 얼마나 환심을 사고 선심을 베풀면서 살았던가? 한번에 그 죄를 다 사면해주려는 듯 엄마는 나를 벌줬다. 당신을 자학하는 일로. 평소 엄마를 존경하고 흠모했던 지인들이 안타까움으로 어쩌지 못했다. 원장 선배는 진작부터 치매 증세 맞다고 속히 검사를 받으라고 했으나 끝까지 부인했다. 그러나  요양원에 장기간 있어야 하는 상태가 되면 재정적 압박이 심해질 일이라 더 미룰 수 없었다. 


병원의 검사를 가기 위해서도 몇 번이나 전쟁을 치렀다. 당신을 숫제 병신을 만들려는 수작이라며 병원앞에까지 갔다가도 진료를 거부하길 몇 차례. 엄마는 병원 검사를 핑계로 밖에 나와보고 싶었을 뿐이었던 터. 나는 속이 타고 애가 끓었다. 과연 내가 버틸 수 있을지 수없이 자문했다.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았다.  문진과 일반 촬영만으로는 치매 소견을 보이지는 않는다는 의사에게 정밀 검사를 해봐주실 것을 요청했다. 마치 엄마를 치매 환자로 낙인을 찍은 것같아 가책을 받았으나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내내 양가적 감정으로 순간순간이 괴로웠다. 의사가 CT 촬영 후 알츠 하이머가 맞다면서 의료보험이 적용될 거라고 친절한 안내까지 해주는데 내 속을 들킨 듯이 그렇게 부끄러워 눈물이 막 났다.  연민과 원망, 가책과 변명을 오가는 숨바꼭질이 거듭되었다. 맑은 정신이 돌아오면 엄마는 내게 심하게 했던 일들이 드문드문 생각이 나는지 잔뜩 움츠려 눈길을 피하셨다. 의사 선생님에게까지 자신을 정신병 환자 만든다고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따져대더니 정신이 돌아온 날,엄마는 예전의 교양있는 엄마가 되어 옷섶을 여미고 깊이 사과를 하셨단다.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미안해요,미안해요,선생님께도 우리 딸에게도......


어느 한 순간,엄마는 곡기를 딱 끊으셨다. 당신이 선택하셨다. 죽음의 순간을. 변을 지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불가항력이란 걸 깨달으셨던지 기저귀를 채우라고 당신이 요구하셨다. 몇 날을 변기를 떠나지 않다가 스스로 용단을 내리셨다. 기저귀에 비치는 변의 색이 심상치 않았다. 날로 다르게 변색이 되어갔다. 초록변이 점점 극심해질 즈음,엄마는 물 먹는 일조차 거부하셨다. 절대 배설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듯이. 그런 엄마 옆에서 나도 허물어져갔다. 어둠이 내려도 전등불을 밝히는 일조차 잊으며 엄마도 나도 말을 잃어갔다. 아이가 야간자습을 끝내고 들어오며 나머지 일들을 수습하는 일이 잦아질 즈음. 엄마는 눈에 띄게 쇠잔해지며 수척해졌다. 요양원에서는 다시 모셔오라며 링거라도 맞혀서 기력이라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정말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또 두려웠다. 엄습해오는 그 공포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요양원으로 옮겨가서도 엄마는 먹는 걸 거부하셨다. 링거줄에 의지한 채,마지막으로 원장에게 남긴 말이 '노숙자,나는 노숙자'였다. 당신은 버려졌다고 단정하신 터다. 며칠 의식과 무의식을 반복하다가 어버이날 찾아간 날부터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병원으로 옮겨지고 장기전에 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길 듣고 돌아왔는데 바로 다음 날 생명연장 처치를 할 것인지를 묻는 전화를 받았다.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아니 어떻게 해야하는지 몰랐기에 동의하고 달려갔다. 


온 얼굴에 렁주렁 매달린 줄과 간헐적으로 그리고 있는 그래프를 보자 그제야 나는 실감을 했다. 결국 엄마는 언니,오빠까지 다 온 걸 확인이라도 하듯 그제서야 숨을 놓으셨다. 2014년 5월 9일,엄마는 세상 소풍을 끝내셨다. 희생으로 키워낸 자식들 중 어느 하나 떳떳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가는 길조차 외로우셨다. 엄마는 평소에도 자주 말씀하셨다. 당신의 죽음을 알리지도 말고 조용히 치루라고, 혹여라도 오는 조문객이 있어도 부조를 절대 받지 말라고. 결혼식에도 축의금을 받지 않았던 그 신념을 나는 존중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처해있는 상황을 한 눈에 짐작할 수 있는 그 상태를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불편을 나 스스로 이기지 못할 것이고 여전히 창피했으므로. 그 모든 게. 그랬어도 모여든 지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엄마는 경기도의 추모원에 모셔졌다. 오빠는 극도의 충격으로 오한으로 몸져 누워 언니와 나,우리 아들 셋이 상주가 되어 엄마의 길을 지켰다. 엄마의 영정 사진을 품에 안은 채 제가 맡은 역을 충실히 해내던 아들 원정이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할머니,할머니를 부르면서. 빈소를 지키며 의연하게 손님맞이를 하던 녀석이 끝내 눌렀던 슬픔을 터뜨렸다. 이내 버스 안 모든 사람들이 오열을 했다. 나는 여전히 멍멍했다.


외로움에 시나브로 기억을 잃어가는 걸 엄마 당신도 모른 채, 그냥 참고 계셨을 그 시간들. 병은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평생 약골이었으나 워낙 총기가 있어 치매에 걸릴 수 있다는 가능성은 감히 짐작도 못했다.  내가 사무실을 다시 옮기고 확장하는 와중이라 엄마는 통증을 내내 참고 계셨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와 대화 한번을 제대로 못했던 시간이 일년 여는 되었으리라. 하루종일 라디오를 벗삼아 쓸고 닦고 밥상을 차리고 치우고......혼자서 그 깊은 외로움을 삭히고 견디고. 팔뚝 아래로 길게 검어진 피부가 엄마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씽크대에 설 수 없어서 의자를 가져다 씽크대 모서리에 팔뚝을 걸치고 설거지를 하고 음식을 준비했으리라. 무너져 내린 몸이 언제부터였는데 난 줄곧 모른 체 했다. 엄마라는 사람들은 그런 희생이 몸에 배인 사람이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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