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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의 예술가 육코치 Jan 12. 2019

고도를 기다리는 시지프스 10

삶이란 바퀴는 굴러갈 운명을 타고 났다. 어쨋건.


아이는 미리 준비했던 계획대로 그 해 미국으로 교환학생으로 떠났다. 나는 엄마 잃은 하늘을 견뎠다. 비밀주머니에는 또 다른 슬픔이 숨어들었다. 화수분처럼 슬픔의 기억만 끊임없이 솟아날 듯,눈물 주머니는 더욱 팽창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을 보냈지만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으로 회색빛 안개 속에 갇혔다. 내면은 언제나 들끓고 황망하여 안정이 되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이제 내가 비밀주머니를 풀어도 되는지 허락을 구했었다. 세상에 커밍아웃하고 그저 그런 상태의 평범한 ‘나’로서 살고 싶었다. 자리에 따라서는 자연스레 내 상황을 밝히는 일이 늘어났다. 사람 관계에서 커튼을 치지 않으니 그것만으로도 홀가분해졌다. 엄마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나를 걱정하셨다. '내가 죽고 상 치르고 나면 네가 망할 텐데 불쌍해서 어쩌냐'고. 엄마의 예언은 적중했다. 철저히 무너져 내릴 시간이 야금야금 다가오고 있었다. 엄마를 보내고 나는 인천이 더더욱 싫어졌다. 처음부터 몸에 맞지 않은 외투를 걸친 듯,겉돌았던 인천 살이였다. 


3년쯤 지나고 마치 각본이 짜여진 듯,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정 반대쪽인 양평의 국수리로 터를 옮길 기회를 얻었다. 대구에서 도망치듯 떠나온 것처럼 이젠 인천을 그렇게 떠나야 할 일이었다. 양평에 가서 새로운 삶을 설계하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나로 살고팠다. 양평 국수리 터에서 상처받고 자존감 무너진 여자들끼리의 연대로 소소한 행복을 즐기며 평온한 삶을 만드는 일.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드디어 나의 사명과 꿈이 생긴 것 같아서 취생몽사의 상태로 한동안 행복했다. 덜컥 공사 진행을 하겠다고 계약을 하고 아파트부터 처분했다. 땅값도 마련해야 하고 공사비도 필요했기에.  2017년 9월 사무실을 정리할 때 12월 입주를 목표로 했다. 근거지를 옮기며 일도 다시 재정비가 필요했는데 애초의 약속이 깨졌다. 늦어도 2018년 9월에는 입주하기로 한 집이 첫 삽도 뜨지 못한 채 연기가 되고 있었다.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사무실도 정리했으니 짐은 짐대로 여기저기 분산되었다. 고정적 일이 없어서 난국을 겪고 있던 최대의 시련이 닥쳐 있었다. 여기저기 이력서도 넣고 다른 일을 도모하기 위해 공부도 하고 자격을 갖춰 나갔으나 경력이 단절되어 어느 하나도 쉽지 않았다. 근근히 강의를 나가거나 개인 코칭으로  최소한의 생계를 이어나갔다.


설상가상 K의 사건이 터져서 우울과 공황 상태를 맞았다. 한 달을 꼬박 앓았다. 자책,공포,불안,분노,공황,우울 등의 감정이 수시로 오르내리며 사람 속을 할켜댔다. 옆에서 이 과정을 다 지켜 본 후배 J와 Y는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다. J는 근 한 달을 함께 기거하며 억지로 밥을 먹이고 말을 시켰다. J가 박사 과정 수업을 가 있을 때는 Y가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왔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말을 시키며 혼자 있게 하지 않았다. 신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를 시험했다. 기적이 따로 없었다.  어려서부터도 '죽음'이라는 존재에 대해 두려움이 없었다. 살고 나는 일이 세상에 정해진 이치이고 명은 정해져 있는 거라 늘 믿었다. '메멘토 모리'는 언제나 명징한 사유로 존재했다. 죽음이 슬픈 것은 결국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감정일 뿐이라고 생각해왔다. 성직자들의 묘역이 가장 편안한 곳이어서 어려서부터 자주 발걸음을 했다. 죽는 게 편안할 수 있겠다는 건,의식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믿음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신은 여전히 내게 ‘사람’에 대해서는 절망을 허락칠 않으셨다. 아무 내막도 모르는 지인들의 호의가 때맞춰 답지했다. 고기를 보내오고,국거리,반찬,김치 종류별로,심지어 잡곡까지 어쩌면 짠 듯이. 다시 살아내야 한다는 지겨움때문에 또 울었다. 


어려서부터 인문학적 소양을 키우며 자신을 닦아왔던 일,진성 아카데미를 통해서 긍휼감과 사명을 생각한 시간들,100시간이 넘는 인권 아카데미를 통해 다져왔던 ‘인간의 존엄성’ 등, 괜히 배우고 괜히 알았다. 아무 것도 몰랐다면 하늘에 대고 삿대질도 맘껏 했을 것이며,좀 타락해도 되지 않았을까? 더 없는 원망으로 다가왔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고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상태로 살았어야 해, ‘나’의 본질은 무엇이며 뭘 이루고 살아야 하는 걸까? 혼돈과 착란의 상태에서 지옥을 경험했다. 핸들을 잡으면 벽에 박아버리고픈 살벌한 유혹을 느꼈다. 사람 얼굴이 마주치면 그저 눈물부터 나서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나를 용서하지 못하겠다. 잠들지 않는 시간 속에서 수없이 엄마의 환영을 보았다. 오도카니 앉아서 유령처럼 나를 응시하던 엄마의 초상화. 차라리 엄마가 편하겠다고도 싶었다. 엄마 뒤를 따르고픈데 엄마를 만나는 일이 또 두려웠다. 왜 왔다고 무슨 변명을 한단 말인가?


슬픔도 나태의 녹을 먹고 무감해져갔다. 슬픔마저 권태로워져서 견디기 힘들 즈음. 드디어 옆의 친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마저 내 우울에 전염이 된 채, 자신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무기력해져갔다. 그건 내가 절대 바라는 모습이 아닌데. 난 내 주변인들이 기뻐하고 환히 웃는 모습이 제일 좋은데,내가 그들의 삶을 좀먹고 있다는 자각이 통점으로 왔다. 밥을 먹기 시작했다. 꼬박꼬박,꼭꼭 씹으며 기억을 되살렸다. 빚쟁이가 되는 걸 가장 견뎌내지 못하는 내 성정에 불씨가 당겨졌다. 누군가에게 갚는 일이 내가 평생에 제일 잘 하던 일 아니던가? 노하우는 좀 많으며?'빚도 재산이야, 그거 모르지? 빚 갚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데?'라고 농담하던 내가 아니었던가? 실제 나의 그 한마디가 새겨둘 어록이 되어 누군가에게는 사고의 전환점이 되기도 했댔다. 맞아,언니가 빚도 재산이랬는데 나는 그럼 그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네라고. 그 덕분에 빚 갚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고.


긴 터널을 지나면서 나는 다시 사람들이 모인 곳에 나가기 시작했고 담담히 말하게 되었다. 당장 해결해야 할 이자며 생존 경비의 부담덕에 자존심을 버리는 일이 쉬웠다. 아는 선후배들을 찾아 강의 꺼리를 부탁하고 뭐든 하겠다고 나섰다. 난데없는 일일 수 있어 자연스레 상황 설명을 붙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해야 하며 어떻게 하면 자존심을 최소 지킬지를 신경썼다. 그러나 다 부질없다. 그저 내 문제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되자 점점 별 거 아닌 일이 되어갔다. 굳은살이 배기고 인이 박혀 수월해졌다. 이제 한 두 줄로써 상황을 설명할 수 있고 당황해하는 상대에게 간간이 헛웃음마저 날릴 수 있었다. 혹자는 그런 얘기를 노출함으로써 오히려 약점으로 비칠 수도 있다고 우려의 뜻을 비췄다. 그럴 개연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안다. 그래서? 뭐 어쩌겠느냐? 그게 불편해서 나를 보지 않아야겠다면 그까지의 인연일 뿐이고,나는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마저 흐트러지며 우울의 대열에 동참하는 걸 나는 더 두고 볼 수 없었다. 다시 뭐라도 해야 했고,그냥 무너질 수 없다. 


삶이란 바퀴는 굴러갈 운명을 타고 났다. 어쨋건. 고도를 기다리던 시지프스는 구르는 바퀴를 둘러멘 채 오르고 오른다. 고통마저 희석되어 단내를 솔솔 풍기며. 끝없는 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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