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얼마만인지? 인천에 살 때, 각별한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지도하던 학생들의 어머니들. 아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만났던 사람들이니 근 30년이다. 거기에 내가 데려다 놓은 후배 둘까지. 그중에서도 진실한 사람들을 내가 매개가 되어 연결했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서로 축하하느라 밥먹고 깔깔거리고.
그들이 작당을 했다. 자기들의 자녀들이 다 내 덕을 봤었고 그 은혜를 잊지 못한단다. 서울대를 나오고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고,미국의 유수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 동생은 공인노무사가 되어 사무실도 내고 이제 결혼 준비를 한단다. 또 한집 첫째는 연대 석사를 하고 스웨덴에 박사를 하러 간다. 그 동생은 연대 석사 합격해서 영화비평을 전공하겠단다.
그렇게 농땡이를 부려서 저 녀석은 뭘 할까 모두 걱정했던 녀석이 4년 전액 장학생으로 부모 돈을 아껴줬단다. 알바를 세탕이나 뛰며 자립할 준비를 한다. 그 여동생은 중국 랴오닝대에 유학을 갔다. 또 한 녀석은 서울대 대학원을 준비 중이란다. 와우.
10년 전을 돌아보니 얼마나 큰 변화인가? 정말 엄마들의 희생적 삶을 알기에 감회가 남다르다. 아이들 얘기로부터 50대 60대가 된 지금, 다시 적어도 30년은 더 살아야할 삶을 조망하며 우리는 또 어디까지 나아가게될지를 전망해본다.
특히나 감동적이었던게 뱃속에 있을 때 본 두 녀석들이 이제 고3이 되었다. 엄마들로부터 소식을 들은 녀석들이 용돈을 헐어 팔찌를 사서 선물로 보냈다. 미국 가서 애기 낳고 교수가 된 녀석과 그 동생도 엄마를 통해 금일봉을 보냈다. 정작 생일은 한달도 더 남았는데ᆢ아무리 나이 깎아줬어도 우리식 나이로 기어이 환갑이란다. 최고로 맛난 이단 떡케익, 과일들을 박스채로 챙겨와서 상을 차려댄다.
현실의 무게로 통곡의 벽을 마주하고 살았던 이들의 약진이 정말 고마웠다. 10년 전 그 까마득한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이 꿈만 같단다. 쌀값조차 없어서 눈물을 삼켜야했는데 누구에게도 티내지 못했다고. 지금도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면서 어떤 얘기든 할 수 있었고 위안을 얻었단다. 울 아들 원정이 결혼식에는 자기들도 다 한복 입고 앉아 있을 거란다.
고맙고 또 고맙다. 다들 잘 견뎌줘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나를 잊지 않고 여전한 사랑으로 응원해줘서. 그들이 떠나간 시간. 그들이 두고 간 금일봉,선물,음식 등을 주섬주섬 챙기며 감회에 젖는다. 참 길게 살았다. 육십갑자를 한 바퀴 돌았다니ᆢ나는 나이 먹어가는 게 자랑스럽다. 필설로 다 풀어낼 수 없는 숱한 고통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에 웃을 수 있으니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