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으로 살기

100-45 진정한 자기로 서는 첫 걸음

펌과 염색을 하려고 미용실에 갔다. 매월 한번은 정기적으로 가는 편이다. 뿌리염색을 하지 않으면 백발이 될 터. 20여 년, 줄곧 한 원장에게 머리를 맡겨 왔다. 처음 다닐 때 30대 초반이던 원장은 이제 50대 중반이 되어 있다. 그니가 운영하는 미용실은 인천에 있다. 양평으로 이사 오기 전에 인천살이하는 내내 맡긴 머리라 지금도 그곳으로 간다. 주변에서는 왕복 3시간이나 걸리는데 뭣하러 그리로 가냐고 한 마디씩 한다. 경제적 효용만 따지자면 백 번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어찌 관계에서 경제적 논리만 유용할까? 나는 머리를 하러 가는 게 아니라 그니를 만나러 간다. 머리하는 건 어쩜 핑계다.


처음 만났을 때 그니는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 스텝도 여럿을 두고 진짜 ‘경영’을 하고 있었다. 직원들에게 극진하게 대할 뿐 아니라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비전을 열어갔다. 가족처럼 똘똘 뭉쳐서 스텝 개개인의 꿈을 지원했다. 매 계절마다 스텝들을 데리고 고급스러운 휴가와 연수를 다니면서 시야를 넓히고 문화 행사에 참여했다. ‘가우디’의 건축 책을 읽으면서 고객의 머리를 하나의 공간으로 여기며 디자인을 했다. 고급 재료를 써서 고객들의 두피 건강을 지킬 뿐 아니라 과잉 매출을 유도하거나 호객 행위를 하지 않았다. 철저한 회원 관리로 고객이 아무리 하고 싶다고 해도 돈을 벌기 위한 양심을 팔지 않았다.


내가 지도하던 학생들이 있던 동네에 있던 미용실이라서 일을 마치고 자연스레 가게 되었다. 그렇잖아도 인천 역시 타향이었던지라 머리를 믿고 맡길 곳을 찾는 것도 만만찮았는데 학부모들이 추천해줘서 가게 되었다. 내가 누구라고 밝히지 않고 조용히 머리를 하러 다녔는데 스텝들과는 달리 원장은 확실히 무게감이 있었다. 내가 말이 없는 사람이라 여겼던지 일체 성가시게 하지 않고 조용히 배려하며 두피 관리를 해줬다. 시간이 지나고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어도 호들갑을 떨거나 과하지 않게 그저 조용한 환대를 이어갔다.


머리 손질할 시간도 없고 너무 바빠서 매일 손질할 엄두도 못내는 나의 특성을 알아서 그녀는 가장 손쉽게 손질할 수 있도록 잘 만져주었다. 한번 펌을 하면 최소 6개월씩은 지나도록 컷만 해주면 컬이 예쁘게 자리 잡으면서 자연스러움을 연출했다. 마음에 쏙 들어서 그곳이 아니면 안될 정도가 되었다. 그녀의 막내 여동생이 스텝으로 함께 있었는데 이 막내는 재능이 뛰어나고 매력적이나 언니가 보기에는 성실하지 않아서 늘 혼이 났다. 막내 여동생은 내가 가면 가끔 자기 언니 흉을 보면서 볼멘 소리를 하곤 했다. 나는 그저 귀여워서 웃기만 했다.



“근데 선생님, 그거 아세요? 우리 언니가 샘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샘 온다고 예약하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요. 무슨 연예인 보듯이 샘을 좋아해요.”


어느 날, 막내가 넌지시 전한 정보에 슬몃 웃음이 났다. 제가 왜 좋대요?라니까 샘은 아는 것도 많고 교양있고 그런데 티도 안 내고 등등......전혀 몰랐다. 그녀도 워낙 점잖고 별 말을 하지 않으니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지 짐작조차 못했다. 우리나라 아이롱 펌과 뿌리 펌 세팅 펌을 1세대로 강의하러 다닌 실력가로 미용실을 경영하면서 전국으로 강의 세미나를 다니던 모습이 참 근사해보였다. 자기가 데리고 있던 스텝들이 독립할 때까지 혹독하다 싶을 정도로 기술을 전수하던 모습. 게으름을 피울라치면 엄하게 꾸짖으면서 자기가 가진 역량을 아낌없이 전했다. 그니와 함께 하다가 돈을 모아서 독립하면 역시 잘 설 때까지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다. 최신 정보를 퍼다 날르고 연수와 교육을 꼭 시켰다.


일에 미쳐 있던 사람이 뒤늦게 아기를 가졌다. 늦은 나이에 임신했으니 걱정도 많았으리라. 그녀가 드디어 침묵을 깨고 내게 질문이 쏟아졌다. 자녀 양육에 관한 질문들이 주류를 이뤘는데 호기심이 끝이 없었다. 질문도 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쏙쏙들이 이해가 되기 전까지는 꼬치꼬치 끝을 보듯 탐색했다, 저런 태도로 매사를 사는구나 감탄하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내가 특히 강조했던 게 문화 예술을 사랑하는 아이로 자라게 하면 되니까 공부 공부 하지 말고 문화 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라고 했다. 나의 경험에서 오는 불문율이라고까지 했다. 내가 책과 문화 예술을 만나지 않았더면 인생이 어떻게 꼬였을지 불보듯 뻔했다.


그녀는 언제나 경청했고, 알려주는 대로 바로 실천에 옮기곤 했다. 한참 책 대여 방문 서비스가 시작되던 때라 다른 태교할 생각말고 책을 대여해서 피곤해도 태중 아가에게 책을 읽어주라고 했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아무리 피곤해도 책을 읽어주며 아이와 교감을 더해갔다. 1주일에 한 번 클리닉을 하러 가면 기다렸다는 듯 궁금했던 내용을 메모했다가 묻고 또 물었다. 딸이 태어나고 본격적인 그녀의 육아가 시작되었다. 에너지가 장난이 아닌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공을 들인 덕에 정말 문화 예술을 사랑하고 다방면에 재주 있는 애로 자라났다. 내가 보기엔 엄마를 빼닮아서 적극적이고 실행력이 짱짱하다. 그러면서도 엄마가 보여준 삶의 태도가 고스란히 배어나와서 사람들을 챙기고 용감하게 원하는 바를 만들어간다.


오늘 전하는 얘기로 고2때 왕창 미친 듯이 놀면서 대학 안 간다고 했다가 고3이 되더니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머리에 띠를 두르더니 한 학기 만에 30점 받았던 수학을 2등급까지 올리고 국어와 영어를 1등급을 만들었단다. 그 와중에도 가고 싶은 임윤찬 연주회를 보러 가고 뮤지컬에 축구 경기 관람에 전국을 돌아다닌다. 방학 중에 가야할 임윤찬 연주회와 뮤지컬이 있는데 엄마가 돈을 안 준대니까 알바해서 돈을 만들 거라고 면접 보러 갔단다. 미친 실행력을 누가 말릴 수 있으랴? 참 멋지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그대여서 저런 딸을 감당했어. 진짜 원장님이 대단한 거야. 걱정 하나도 하지 않아도 되겠어. 세계 어딜 던져둬도 자기가 어디 서야할지 알 아이니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격려했다.



저토록 목적의식이 분명하고 자기 신뢰를 갖는 일이 쉽지 않은데 나는 어려서 원없이 경험한 문화 예술의 힘 덕에 격조 있는 아이로 자라났다는 생각이다. 아이가 엉뚱한 데 눈 팔려 딴짓을 하고 있을 때도 나는 저 아이는 스스로 품격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맛을 봤기에 절대 자신을 함부로 두지 않을 거니 그저 기다려주라고만 했다. 속으로 열불이 터지고 가슴을 칠 일이었지만 잘 기다려준 덕에 또 한뼘 자라난 딸을 만날 수 있었다. 딸이 없는 나는 늘 딸 가진 부모들이 부러웠는데 정말 며느리로 삼고 싶은 애다. 비극적이게 우리 아이와 동성동본이라 꿈도 못 꿀 처지다.



자녀가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몰라서 답답해죽겠다는 부모들을 만난다. 당연히 탐색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좌충우돌 몸으로 부딪치며 알아낸 경험이 없기에 자녀들은 수동적 삶을 살밖에. 유독 대한민국의 엄마들만 자녀들의 경제적 자립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 아실려나? 친한 중국 동생도 아이들이 성인이 되자 일체 용돈 제공도 끊었다, 남매는 알아서 알바로 돈을 모으고 아껴 쓸 궁리를 하면서 독립적 존재로 성장한다. 심리적 울타리를 크게 치고 이제 믿어줄 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상황 상 일찍 경제적 독립을 하게 된 울 아들도 참 고맙다. 자기로 서는 일. 경제적 독립으로 부터인데. 나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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