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 무슨 연유였는지 잠을 이룰 수 없어서 밤을 꼴딱 새버렸다. 잠을 자지 못해서 괴롭지는 않았는데 어째서 각성된 상태로 잠을 이룰 수 없었을까? 2023년의 후반기도 한 달 훌쩍 지내보냈다. 년초에 계획했던 일들을 얼마나 진척시켰는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생각이 시작되었던 듯하다. 7개월 내내 쉬지 않고 무지 바쁘게 돌아갔는데 정작 제일 급선무로 완료하려 했던 일에 대한 진척 사항이 보이지 않는다. 어쨰서였을까를 생각하면 그럴만한 이유도 충분하다. 함께 성취를 이루려 하니 구성원들끼리의 합이 중요해서 느리게 학습하며 다져가는 중이다. 그렇다면 고민의 결이 달라져야 했던 거 아닐까?
이제 어떻게 박차를 가하면서 나아가야 하는지를 계획 설계하면 되는 일인데 왜 고민을 하고 앉았던 것일까? 나는 함께 하겠다 한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누락시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갖고 있는 듯하다. 중간에 상황이 변할 수도 있고 마음이 변할 수도 있어서 얼마든지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고지식하게 쓸데없는 신념을 붙잡고 있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관계에서 불편한 상태에 놓이는 게 싫어서 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막상 만나서 얘기하다보면 끝맺음이 되어버려서 여지조차 잘라 버릴 수 있음이 불편한지도 모르겠다.
11시가 넘어 코칭 받으러 울림 코치가 왔다. 매주 코칭을 받으러 양평으로 올 때는 아예 시간을 비우고 온단다. 마치 휴일 여행을 오는 듯 힐링이 되는 날이란다. 토 일요일이 따로 없이 일이나 교육이 진행되고 있어서 휴일이 따로 없었다. 나도 그녀도. 코칭하는 수요일이 서로에게 휴식을 주는 귀한 시간이다. 오늘의 주제와 목표를 세우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탐색을 잘 마쳤다. 결국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면서 상대의 성장을 도울 것인가?‘를 고민하던 울림 코치는 문제로 여겼던 것을 옷 잘 개듯이 차곡차곡 정리를 다한 느낌이 든다고 만족해했다.
집에 있던 반찬들을 다 동원해서 맛나게 점심을 먹었다. 쌈채소와 오이, 고추, 소불고기, 돼지 주물럭으로 배를 채우고 끝없이 얘기를 펼쳐내었다. 어찌 이리 끝도 없이 풀어가는지. 통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시간이 갈수록 탄력을 더한다. 피크닉처럼 나선 양평길이니 분위기 있는 곳에서 차 한잔 마셔줌이 예의겠거니. 북한강변을 달려서 엔로즈 카페로 날았다. 비가 오락가락했던 터라 높은 양철 지붕 아래 자리에 앉으면 얼마나 멋진 하모니가 번질까 기대되는 마음이었다. 아니나 달라, 카페 전경으로 펼쳐진 계곡에서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와 함께 토도독 흩날리는 비의 군무가 장관이었다. 게다가 진하디 진한 커피향 덕에 마음이 사르르.
주인장이 나려주는 드립 커피를 받아내는 눈물 맺힌 커피잔. 내가 좋아하는 잔이다. 울림 코치는 예상대로 계곡의 푸른 나무들을 보면서 ’와, 역시 코치님과 저는 이런 자연의 색에서 에너지를 얻지요. 정말 좋아요.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아요.‘ 각자가 읽고 싶었던 책들을 꺼내서 자신의 호흡대로 읽어나갔다. 녹색광선 출판사의 신간 까뮈의 <결혼. 여름> 에세이를 읽다가 울림 코치에게 선물하고픈 문장들을 만났다.
“적어도 이 순간에는 황금빛 꽃가루가 덩실거리는 저 너머를 통해 모래 위로 끊임없이 밀려오기를 반복하는 파도가 보였다. 바다, 들판, 침묵. 이 대지의 내음, 이 모든 향기로운 생명이 내 몸을 채웠고, 나는 이미 황금빛으로 익은 이 세계의 과일을 배물고서 입술을 따라 흐르는 달콤하고 강렬한 과즙이 느껴지는 것에 감격해 마지않았다. 아니, 중요한 건 나도, 이 세계도 아니고, 바로 이 세계로부터 내게 사랑을 싹틔우는 일치와 침묵이었다. 나는 나만을 위한 사랑을 요구할 만큼 약하지 않았다. 태양과 바다에서 태어난 흥미롭고 활기찬 종족, 단순함에서 위대함 길어 올리며 바닷가에 서서 하늘의 눈부신 미소에 동조의 미소를 지어 보이는 종족 전체와 사랑을 나눌 의식과 자부심이 있었으니 말이다. -’티파사에서의 결혼 중에서 27쪽
울림코치와도 나눈 이야기인데, 코치다움을 수련해가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평소에 큰 문제라 여겼던 사건들도 이제는 그냥 지나가는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하다는 느낌. 쉬이 흘려보내고 가만 바라볼 수 있는 이 상태들. 다음 순간 또 착에 빠지더라도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자유롭다. 공간이 주는 위안, 향이 전하는 여운, 목을 넘기는 커피, 귀로 들은 물소리, 새소리, 눈으로 확인한 학 날갯질......오감으로 앵커링하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