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다. 태풍 카눈도 물러갔다. 아들도 일본 후쿠오카로 여행을 떠났다. 옆집 현실이도 출장에 휴가로 긴 길 떠났다. 사위가 적요로 가득하다. 느린 아침을 챙겨 먹자고 냉장고를 열었다.
샐러드용 야채는 다 비워서 없다. 그러고보니 강화에서 왔던 감자 생각이 났다. 세상에 근 한달이 되어가는데도 싹도 안 났다. 알은 작으나 야무지게 제 꼴을 지키고 있어서 신기했다. 건강식을 먹는 분들 중엔 거의 흙을 제거한 정도에서 껍질까지 먹기도 한다. 그런데 흙을 떨쳐도 여전히 흙이 묻어 있는 느낌이라 하나하나 껍질을 벗겼다.
자색 껍질처럼 보이는데 속이 노란 감자는 특히나 고소하고 맛났던 기억이라 기대가 되었다. 껍질 벗긴 속 노란 감자 10알을 렌지에 돌려서 먹었다. 한 입에 쏙쏙 들어가니 재미도 났다. 나머지 감자를 다 벗겨내고 나니 계란장 양념이 남아있던 게 기억이 났다. 일부를 그 장 양념에 양파와 버섯, 다른 양념을 더 넣어서 감자조림을 했다.
일부는 채를 썰어 양파와 매운 고추를 넣고 기름에 볶았다. 감자볶음만 보면 여고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무리지어 악동짓을 했던 친구들 넷이서 매일 학교에 먹으러 다녔다. 친구 하나는 감자볶음을, 나는 콩나물 무침을, 또 누구는 고추장볶음을, 또 하나는 멸치볶음이 집집마다 특장 반찬이었다. 넷은
의 가방에 책은 거의 없고 찬합과 반찬통으로 가방의 공간을 거의 다 차지했다.
쉬는 시간마다 찬합 하나씩을 펼쳐 반찬들을 넣고 비벼서 맘껏 흔든다. 뚜껑 열기 무섭게 숟가락들이 달려들어 바닥을 비운다. 그 비빔밥이 어찌나 맛있는지 질리지도 않는지 다른 반찬을 가져가고 싶어도 절대 불허였다. 반 친구들이 거의 기웃대며 한 숟가락씩 퍼먹는 재미라니 ᆢ함께여서 더더욱 맛나고 즐거웠던 것. 지금도 코끝으로 고소함이 지나간다. 귀로는 깔깔대며 왁자하던 소리들이 울린다. 마냥 행복했던 시간들.
나도 모르게 피식 피식 웃음이 난다. 고요를 깨는 몸짓. 추억이 없다면 사람은 얼마나 외롭고 적막할까? 잊고 싶은 기억들도 있겠지만, 지금-여기에 몸으로 느낀 감정은 내 감각 곳곳에 새겨져있다가 문득 문득 그 장면들을 소환한다. 참으로 신비한 노릇이다. 기억을 떠올리고 다시 지금 이 자리에서 느끼는 감정까지 더해져서 하나의 정서를 이룬다. 지금 그 때 그 사람들은 없지만 그때 느낀 감정은 영원히 남아 지금을 살아가는 자원으로도 활용된다.
어제 사랑이라 믿었던 사람을 떠나보낸 지인의 아픈 이별을 지켜봤다. 제법 기특하게 잘 정리를 하고 있네 싶었지만 나도 안다. 사랑한 만큼 제법 긴 시간 불쑥불쑥 올라오는 감정에 눈물짓기도 하겠지. 함께 먹었던 음식, 함께 머물렀던 공간, 함께 들었던 음악 등 회억할것들이 넘쳐날 게다. 밥이라도 먹었나 싶어 걱정되어서 카톡을 넣어봤다. 달리고 왔다는 회신이 있기에 안심이 되었다. 사랑에 충실했던 자신이 바보같을 테고, 상대가 원망스럽기도 하겠지. 누구나 상실을 경험하면서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한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밥을 먹다가 설움에 겨워 눈물과 함께 밥을 삼키곤 한다. 우걱우걱 입에 남은 것들을 삼킬 때 설움이 더 커진다. 속 끓이며 4kg이나 내렸다는데 아직은 밥 먹는 일이 서럽지 않길 빌어본다. 상실을 경험할 때 가장 힘써야하는 것이 일상을 회복하는 일이다. 먹고 싸고 자고 하는 일이 가장 귀한 일이라는 것.
볶은 감자채를 반찬통에 담고, 졸인 것도 담고, 그래도 남은 양념장이 있길래 닭고기도 졸였다. 가만 보면 레시피도 없이 대충 있는 재료와 양념으로 흉내를 내본다. 나쁘지 않다. 어릴 때 엄마가 그러셨다. 남자들이 음식을 더 잘하는 이유가 양념 아끼지 않고 팍팍 쓰니까. 엄마들은 양념도 아껴가며 맛을 내려 노력한다고. 거의 해주는 밥만 먹다가 최근 나를 위해 차리는 요리가 낯설지만 재미있다.
얼마만인지? 이토록 완벽하게 고요한 날을 맞은 게. 혼자서 냉장고 속 야채들을 정리하고 요리하고 치우고. 오늘은 감자를 주식으로 먹었다. 이를 데 없이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넷플릭스에서 영화도 두 편 보고, 책도 일고, 오래도록 소식 전하지 못한 친구와 잠깐 카톡을 주고받고. 후쿠오카에 도착한 아들이 무사히 와서 맛난 거 먹으러 간다고 전화를 해왔다. 그래, 맘껏 자유롭게 지내고 오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시간들을 잠시 내려두고 맘껏 자유롭길ᆢ
이제 취미생활로 하고 있는 교육 4시간 듣고 잠자리에 들어야지. 귀뚜라미 소리가 커진다. 가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