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에게 부여된 첫 번째 과제는 뭐였을까? '선 긋기'. 무슨 소리냐구? 아담은 자연계의 동식물에 이름표를 달아줘야했다. 구별지어 이름 짓기 위해서는 '분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슷해 보이는 것끼리 묶어내면서 비슷하지 않은 것들을 끊임없이 무리에서 가려내야했다. 그는 어쩌는 수없이 마음 속에서 '경계를 긋는' 일을 배워야 했다. 아담은 안과 밖, 선 이쪽과 저쪽이라는 정신적인 또는 상징작인 구분선을 설정하였다. 그는 최초로 자연의 윤곽을 지도로 그러내고, 마음 속에서 구분 짓고, 도식화하였다. - 켄 윌버의 <무경계 > 참조
인류의 시작과 동시에 인류는 선택할 것과 선택하지 않을 것 사이에 경계선을 그으며 결정을 시작했다.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마시고 어떻게 살 것인지, 안과 밖의 분리된 대극을 선택하며 산다. 될 수 있는 한 긍정적인, 선 안의 것을 택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써보지만 종종 선 밖의 것을 택함으로써 불행의 늪에 빠져든다. 가급적 나와 선이 비슷한 사람만 받아들이고 선이 다르다 싶으면 분리하고 밀어낸다. 그게 나를 지키는 일이라 여겨져 자기돌봄하느라 자신의 경계선을 확고히 하고자 애쓴다.
최근에 내가 자신의 경계를 침범했다고 생각해서 불편함을 얘기한 사람이 있었다. 선 넘은 것인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단지 그 선을 넘어도 될 만큼 서로가 허용적이고 수용적인 관계라 믿었던 게 문제였다. 나만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이고 그는 용납이 안되는 바였을 뿐. 나는 예의상 가급적 선을 지키려 하지만, 적어도 강력한 신뢰 관계 안에서는 서로 선을 넘나들기도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갈등이 빚어지고 충돌한들, 그때야 그 신뢰 관계의 공고함이 발휘되는 거라고. 투명하게 서로 고백하면 되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게 진실한 관계라 여긴다. 막연히 선만 지키고자하면 영원히 피상적인 관계로 끝난다. 그럴 양이면 평소에 상대가 오인할 만한 표현을 삼가하든지.
영화 <기생충>이나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이 '선'을 공고한 '성'처럼 여긴 이와 '선'을 넘은 이의 충돌과 복수를 그리고 있다. 각자의 기준 따라 설정한 선들이 누구에게는 수단의 선으로, 누구에게는 실존의 마지노 선으로 있다. 선으로 우위 위계를 삼은 이들은 내면에 언제나 '어디서 감히'라는 전제가 있다. 누가 그들에게 무지막지한 권력을 쥐어줬을까? '도'를 넘어 '실존'을 위협하는 무뢰한들에게 천시받은 자들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게 된다. 존중 않고 대우를 해주지 않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어도, 생존과 실존을 건드리는데 그저 죽을 수는 없는 셈.
나나 할 것 없이 선을 잘 지키고 있다고 믿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경계를 무시로 침범하고 타인의 실존 경계를 밟고 있는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 선, 경계를 짓는 일에 대해서 깊은 숙고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몇 날 켄 윌버의 <무경계>를 꼼꼼히 읽고 있다. 안과 밖의 경계는 애당초 없었다. 이쪽과 저쪽이라는 대극을 만든 건 내 마음의 작동일 뿐, '궁극의 실재에는 아무런 경계가 없다'. 마음의 작동을 보기 위해서도 이 <무경계>로 진성아카데미에서 독서클럽장이 되어 리딩을 해봐야겠다. 내가 잘 배우기 위해서 클럽장이라는 모자를 써봐야지.
매미소리 한창이다. 자연한 것들은 일체의 경계가 없어 삶과 죽음마저 초연하다. 행불행,고통과 쾌락, 슬픔과 기쁨의 대극점을 안고, 불행할까봐, 아플까봐, 고통스러울까봐 가시 경계선으로 스스로를 속박한 인간. 그 숙명이 애닲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