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고마운 동생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는 시간에 영혼이 따듯해져 내내 뭉클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살아갈 날에 대한 계획을 들으며 기꺼이 서로 나눌 수 있는 정보를 내놓고 자원을 모았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알아차리며 각자의 시간을 설계했다. 그에 더해 자녀 교육과 진로에 부모가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토론을 하기도 했다.
먼 동이 터오는데도 우리의 대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현실이는 미역국을 끓이고 조촐한 식탁을 얼른 차려냈다. 머위들깨탕까지 곁들여졌다. 자급자족을 꿈꾸는 린다는 내내 부러움을 표했다. 제철 음식을 먹는다는 것, 진정 축복이다. 간밤의 유쾌했던 시간들이 복기하면서 우린 또 웃었다. 공기 중 흐르던 배려, 존중, 나눔, 배움, 다양성이 우리의 시간을 의미로 채웠다.
12시에 현실 커플에게 우리에게 보여준 존중과 환대에 대해 깊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둘을 남기고 7명은 '강화평화전망대'로 갔다. 쿠바 사위 조단이 가고 싶어했던 곳으로. 1.8km 앞이 북한이다. 바닷물을 사이에 두고 물은 이쪽저쪽을 가리지 않고 넘나드는데 우리의 발목은 서로 묶여있다. 조단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진지해져서 배우려는 태도를 잊지 않는다.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빨간 셔츠를 입은 주민 한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벌판을 달리는 장면을 포착할 수 있었다. 또 더 멀리로는 흰 셔츠를 입은 사람 셋이 걷는 모습도 보였다. 북한의 쌀 생산량의 30%를 담당하는 연백평야를 직접 본다는 특별함이란. 푸른 벼가 잘 자라고 있는 듯해서 안심이 되었다.
강화 읍내에 있는 조양방직카페로 옮겨갔다. 평일임에도 주차장도 카페도 사람으로 꽉 차 있다. 폐가라 말해도 아쉽지 않을 낡음이 콘텐츠가 되는 곳. 그곳에서는 '새것'이 낯설다. 황학동 중고 시장에서 보던 물건들로 그득한 곳. 철사 옷걸이가 녹이 슨 채로 서로 엉켜 설치 미술 작품이 되는 곳. 빛 바랜 LP판 자켓들. 우리의 젊은 날을 고해 바치던 가수, 배우들의 사진. 숱한 연정을 실어 날랐던 공중전화 박스.
알록달록 촌스런 조명, 장난감, 선동성 그득한 선거 벽보, 세기의 캐릭터들은 다 모였다. SNS 피드를 도배하는 화장실에서의 셀카. 귀신같이 잡아내어 화장실을 온통 사진 찍을 스튜디오로 변신시켜뒀다. 헛웃음이 날 정도. 중앙벽엔 챨리 채플린의 무성 필름이 끊임없이 돌고. 사람들은 악을 악을 쓰며 소통 중. 진풍경이 펼쳐져 있다. <인간시장> 소설 속 한 장면을 떼놓았나 싶다.
조단은 정말 흥미로워하며 데리고 가준 내게 연신 고맙다고. 정말 환상적이라고ᆢ자신은 이런 인간의 스토리가 담긴 공간을 좋아한다며 바삐 오가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녹슨 양철 담벼락 너머엔 꿈틀대는 역동이 살아 숨쉬었다. 꽃도배를 한 양변기가 거실 중앙에 떡 하니. 제임스 딘, 키아누 리브스, 이주일이 사이좋게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널찍한 공간 사이를 누비며 상상을 얹는 일. 남녀노소 각자 즐길 거리들이 그득했다. 학교종을 울리고 쿠바 거리에서 만남직한 버스에 오르고ᆢ삐걱대는 양철 선반을 오가는 재미.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제대로 적용. 거대한 자본력만이 재미도 지키고 싶다는 걸 또 확인하는 자리. 조방방직에서 천을 짜던 그 자리에 야윈 소년 소녀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미래의 꿈을 벌고 있다. 어쩌면 일본 여행 한번 다녀오면 깡통을 차게 될지도 모를 금액을 벌자고 아침 잠을 설치며 출근을 서둘렀겠지.
세상은 진짜 요지경 속이다. 천태만상의 움직임이 펄떡이는 곳. 한낮 무궁화 동산을 따라 올랐던 평화전망대, 조양방직 카페. 극과 극을 체험하는데 각기 재미를 누렸다니. 조단은 오늘을 완벽한 날이었다고 최후 진술을 해줬다. 그치. 더함없이 편하고 재미나고 유익한 여행이었지.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성'을 진하게 느낀 시간과 공간. 인간이 지지고 볶으며 붙어사는 이유들.
시간ㆍ공간ㆍ인간, 기억과 경험 속에서 배경으로든 차경으로든 전경으로든 어떻게든 연결된다. 거대한 인드라망속에서 내일은 또 어떤 서사를 그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