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여성 리더 아카데미 1박 2일의 워크숍이 아주 알차게 진행되었다. 지혜의 숲,지지향에 묵으며, 아트인문학, 책 만들기 체험, 파주 출판단지 탐방, 타로, 명상에 이르기까지 다해로운 체험과 발견이 있었다 . 파주 출판단지를 여러번 찾았어도 지지향에서 숙박한 적은 없어 기회를 봤는데 드디어 그곳에서 밤을 지내봤다. 책만들기로 <어린 왕자> 한 권씩을 선물받았다. POD 소량 주문 출간이 가능하다는 건 신선했다. 일생 책 한 권쯤 갖고 싶은 소망이 쉬이 이루어지는 시대이다.
지혜의 숲부터 출판단지의 여러 곳을 도슨트의 안내 따라 다니며 인문정신이 빚은 위대함에 감사함이 느껴졌다. 세계적으로 프랑크푸르트, 볼로냐, 라이프찌히 등 책도시들은 있으나 책과 관련한 인쇄,유통,서점,박물관에 이르기까지 일원화되어 있는 곳은 유일하단다. 40여년 전부터 출판인과 예술인, 건축가들이 뜻을 모아 조성한 출판단지와 미디어 아트 공간의 미학이 어우러진 곳이다. 곳곳에 스토리를 담고 있으니 보물찾기하듯 건너 다녔다.
한글을 모티브로 달항아리와 함께 세계 곳곳에 조형물을 설치하게 했던 강익중 작가의 작품이 있어 무척 반가웠다. 911 사태를 애도하며 불국사의 석가탑 모양에 한글 대신 영어로 애도의 마음을 담았다. 탑에 걸터앉은 초록색 탐험복을 입은 남자는 쌍안경으로 저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탑 기단은 반투명의 큐브 안에 한국적 문양과 오브제들을 넣어서 끝없는 기원의 마음을 담았다. 연꽃 문양, 오방색의 단청 등이 어우러진 탐험가의 옷, 노트북을 담았을 서류가방엔 미래의 코드가 담겨 있을 듯해서 여전히 희망적이다.
주말을 맞아 3대 온가족들이 지혜의 숲으로 북캉스를 오기도 하고, 막 걸음마를 떼는 아기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젊은 부부, 연인끼리. 희끗한 머리칼의 시니어 부부들. 책읽는 이들의 옆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집 근처에 이런 기반을 가졌다는 건 엄청난 특혜일 터. 파주 인근의 시민들이 부러웠다. 문발로, 회기로 등을 잇는 우리나라 유수의 출판회사들을 둘러봤다. 나남출판사의 담쟁이 잎들이 바람에 펄럭대는 모습이 마치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는 듯 장관이었다. 책을 세워둔 듯한 모양의 한길사, 영화촬영지로 자주 출연한 여러 건축물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도열해있다.
지역의 습지 생태를 살리면서 조화를 꾀한 건축의 변신은 공간에 다양한 숨결과 표정을 입혔다. 책을 모티브로 한 구역, 수변구역의 흐름을 살린 곡선들이 인문정신에 감응하고 있는 듯했다.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기에 헌 책방을 찾았다. 파올로 코엘료의 몇 권 건너 뛴 것이 있었는데 마침 잘 되었다. 6권을 샀는데 2권 값에 미치지 않는다. 골라내는 재미는 있었으나 '보물섬'이란 이름의 헌책방엔 책 목록들이 좀 아쉬웠다. 겨우 6권으로 털고 나온 것안 봐도 안다.
이번 워크숍 기획력이 아주 좋았다. 장소 선택은 물론 콘텐츠, 시간과 동선의 분배 등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조원을 제외하고는 리더들 전체를 알아갈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 서로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져본다든지 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면을 익힐 프로그램 하나쯤 있었으면 싶었다. 그룹 규모의 제약성으로 인해 일방적 강의식, 실습형 과목이 소개형에 그치니 살짝 갑갑함이 생기기도 했다. 프로그램 구성 시 고려해야하는 다양한 변수들에 대한 고민이 더해진다.
전체 일정을 끝내고, 진성 4인방은 내가 안내하는대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을 방문했다. '열린 책들' 출판사가 포르투칼의 건축가 알바르 시자에게 의뢰해 건립한 전시 공간이다. 흰색의 노출 콘크리트 건물로 다양한 곡면과 역동적인 직선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전시 공간은 가급적 인공광을 배제하고 자연광의 변화에 따른 빛의 향연을 감상할 수 있어 특별나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공간이라서 몇 번을 왔지만 올 때마다 또 좋다. 오늘은 때를 맞춰 도슨트의 건축물 안내를 들을 수 있어 더욱 입체적인 시간을 즐겼다.
마침 김찬송 개인전이 열렸는데 인체의 일부들이 겹쳐지고 포개지거나, 피부가 맞닿은 그곳의 모호한 경계를 줌 인으로 포착한 그림들이 인상적이었다. 피부색을 드러낸 여인의 부분들과 초록의 음영에 따른 경계의 무너짐을 거칠게 투박하게 처리한 일체의 기법이 특징적이었다. 전시장에 스며드는 빛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림들. 커다란 전시장에 덩그마니 높인 사람들의 위치성. 건축가가 상상한 공간의 무대에서 각기 진지하게 또는 장난스럽게 구부리고 숙이며 몰입해있다.
그림 앞에 서 있는 젊은 커플들의 뒷모습을 보며 그들의 사유를 훔쳐본다. 청년들끼리 다소 수줍은 듯 조심하면서 그림 하나하나를 공간 곳곳을 디디는 모습들이 어여쁘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건축과 그림들은 필경 어느 날엔가 불쑥 뮤즈의 여신이 되어 누군가의 심장을 헤집어 놓겠지? 그들의 손끝에서 창작의 나무가 자라나고, 기획의 착상이 되어 나오겠지? 젊었을 때 학생들 데리고 문화 예술의 현장을 데리고 다니며 사명감에 불탔던 그 시간이 떠올랐다. 내가 숱한 고통의 계곡을 건너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건 문화 예술을 향유했던 시간이 있어서였다. 그러고보면 나 많이 행복했네. 모든 게 감사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