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에는 인간이 진리이다

현대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과 낭만주의에 대한 변론

by 민해경

효율과 합리주의가 이성으로 간주되는 현대 사회에서 인문학을 한다는 것, 더 나아가 휴머니즘에 사유를 추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니다. 합리주의와 가치중립의 사상들이 자연과학을 넘어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침투하고 있는 학문적 조류는 휴머니즘과 생명주의를 위해서 초현실주의적 사유를 통해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씌워진 합리주의라는 탈을 벗겨내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일종에 사상적 투쟁을 필연적으로 거쳐야 한다.


근대성이란 개념의 등장은 과거 진리의 역할을 담당하던 종교의 역할을 대신했다. 죵교가 고대 텍스트나 초월적 의식에 의존하여 진리를 창조했다면, 근대성은 합리적 이성과 그에 기초한 판단을 통해 진리를 만들어갔다. 이와 동시에 산업 혁명이 경제-물질적 요건을 변화시키며 효율은 합리주의와 맞닿아 사회에서 진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인데, 주류 학계는 이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진보로 규정하지만 이는 그저 역사적 변화일 뿐이다. 위에서 짧게 설명했듯이 근대성의 역할은 대단히 새롭고 혁신적인 것이 아닌 그저 종교라는 초월-절대적 성격에 진리를 합리적 성격에 진리로 대체한 것이다. 현대 사회는 합리성을 근대성의 핵심 요소로 보기에 이를 진보라 여기겠지만, 초현실주의적 시간관을 통해 본다면 인류 문명의 변화일 뿐이다.


이러한 근대성은 자연과학을 발전시키고 인간을 초월적 존재로부터 해방시켰다는 공이 존재한다. 특정한 초월적 존재의 매개가 아닌 인간 스스로 자연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식을 부여한 것이 근대성의 제일 큰 업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성은 스스로 신이 되려 했다. 그리고 지금 근대성은 하나의 신이 돼버렸다. 낭만과 사랑 같은 인문에 근본을 과학으로 해석하고 규정하려 하며, 사회에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불길 위에 세우고 있다. 마치 종교 지도자들이 천동설을 부정하는 철학자들을 화형시킨 것처럼 말이다. 근대성은 종교라는 도구적 이성을 비판의 무기로써 붕괴시켰지만, 스스로 도구적 이성이 된 것이다.


사회과학 역시 근대성이라는 도구적 이성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경제학은 정의와 인문적 가치를 무시한 채 공허한 숫자를 논하는 학문이 되었고, 시장은 중립적이다라는 허황된 소리만 반복할 뿐이다. 교육은 정의로운 인간과 민주적 구성원을 기르는 것이 아닌 인적 자본이라는 한 명의 기계를 만드는 도구가 되어버렸고, 사랑과 낭만이란 가치는 등급과 숫자라는 폭풍에 휩쓸려 조각이 되어 흩뿌려지고 있다. 아이들의 아름다운 푸르름은 얼룩지고, 사회는 미래라는 거짓된 약속을 할 뿐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오글거림'이란 표현으로 비난받고, 걱정과 공감이라는 연대는 '오지랖'으로 멸시받고, 여유로움은 '게으름'이라는 표현으로 핀잔을 당한다.


근대성을 예찬하는 이들은 낭만과 감성은 공허한 몽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인문학은 현대 사회에서 필요치 않으며, 효율과 성장에 방해되는 요소로 간주한다. 맞다. 낭만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감성은 냉정하고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근대성이란 개념은 산업 혁명과 함께 지난 몇 백 년을 지배했지만, 낭만과 감성, 그리고 사랑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왔다. 근대성이 인문을 아무리 폄하해도, 그들의 합리성이란 무기로 공격하더라도, 인문이란 방패는 곧곧히 버틸 것이다. 부서지고 붕괴되는 것은 인문이 아닌 근대성이라는 무뎌진 칼일 것이다. 어떠한 과학도 논리도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 인간은 자유를 꿈꾸고 사랑을 좇는 낭만적 존재다. 그리고 그 존재는, 결코 거짓된 진리 앞에 무릎 꿇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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