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정치성과 참여예술

by 민해경

벤야민에게 있어 이미지는 변증법적이며, 동시에 해방의 잠재력을 가진 혁명적 사물이다. 좁은 의미에서 이미지로 칭해지는 특정 예술이나 여타 작품들을 넘어 일상적으로 파악하고 감각할 수 있는 이미지 모두가 벤야민에게 있어서는 혁명성을 지니는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예술을 넘어 일상적으로 접하는 대중문화 등 모두 벤야민의 입장에선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순수예술이라는 것은 현실의 문제를 동의하지 않은 대리인을 통해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했으나, 서정시 또한 하나의 정치적 산물로 존재하는 것이다(참고로 위에 문구는 아우슈비츠를 그저 과거의 기억으로 묻으려는 역사주의자들에 대한 아도르노의 일침이다, 배경을 고려하면 문제될 것은 없다).


예술과 문화 -마르크스주의에서의 상부구조-는 혁명성을 띄고 정치적이기에, 현대 사회운동에서 문화적 투쟁이 차지하는 위치는 방대하다. 또한 우리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설국열차], [미키17]과 미국의 [조커] 등 여러 영화에서 완성도 높은 예술작품이 폭로하는 자본주의가 수많은 운동가들의 일장연설보다 효과적임을 목도했다. 이러한 점에서, 벤야민의 말처럼 이미지는 분명한 혁명성을, 그것도 감히 측정할 수 없는 정도의 혁명성을 지닌다.


그러나, 과연 이미지가 지니는 혁명성이 위에서 그치는 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존재한다. 벤야민에게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개념은 '기억'이다. 그리고 두 요소는 상호보완의 관계를 넘어 사실상 하나의 개념이라고 보아야 적절할 것이다. 벤야민이 주목한 것은 오래된 사물, 키치 등의 이미지들이 담고 있는 기억의 지점이었다. 또한 이 기억은 비자의적 기억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는 측정할 수 없는 혁명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 -그 조작은 자의적으로도, 타의적으로도 발생한다-부정의 기억을 긍정의 기억으로 흡수해내는 경향이 존재한다. 이러한 의식적 경향 속에서, 어떠한 이미지가 인식될 때 그 개인의 무의식 속에 잠들어있던 진실이 도래하며 찬란한 것으로 조작된 꿈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이다.


기억 속에 잠들어있던 부정의 과거가 개인에게 도래했을 때 개인은 비로소 혁명적 주체이며 해방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벤야민에게 있어서 기억과 이미지는, 해방과 혁명에 있어 분리할 수 없는 관게이다. 그렇다면 기억과 이미지는 깨어나기의 역할으로써만 존재하는가? 어떠한 것을 부정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반대편에 긍정이 있다는 것의 반증이며, 이에 따라 이미지와 기억에는 긍정과 부정이 함께 존재한다는 '변증법'적인 결론이 도출된다.


이에 따라 현실에 대한 부정과 비판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그적 예술은 그 자체로서 반변증법적인 행태이며, 문화로써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무조건적인 긍정과 무조건적인 부정은 배 다른 형제의 관계로써 연을 맺는다. 되려 예술은 그 결을 유지할 때, 그 진정한 혁명성이 분출되며 기억의 변증법 속에서 해방의 각성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상업예술에 대한 비판은 그 예술의 순수함 -정치성과 혁명성을 그 자체로 내포하는-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 순수함은 변증법이라는 혁명의 무기를 차고 있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그 예술과 상업예술의 두 도구적 근대성을 분해하는 조각임을 알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민족주의에 대한 고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