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부정변증법, 부정과 삶에 대하여
지금까지 나의 글에서 지속적으로 다뤄온, 일종의 부정의 사유로 대표되는 철학은 앞선 세대의 철학자-아도르노와 벤야민으로 대표되는-들에게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인간과 소외, 더 나아가 자연 개념에 대해 일방적 권위에 해체, 자유 개념의 현실적 급진화 등 그 부정의 사유는 인간이란 지평을 개인에서 사회로 넓혀 사회 속에 개인을 비동일자의 상태로 보존하려는 투쟁이었다.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작업은 그 위대함을 일일이 나열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종교에 지배당했던 근대 이전의 철학과 그 이후 이성이라는 개념에 포섭된 근대 이후 철학에 파열을 내며 "인간 주체의 신화"의 철학을 만들어낸 그들의 철학은 그 자체로 위대한 업적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학문은, 어떠한 사유는-그것이 과학이든 사변이든 간에- 사회적 존재인 인간을 분석하기 위해 사회를 본다. 그러나, 그 사회는 결국 인간으로 돌아온다. 결국 개인에서 사회로 향하던 화살표는 다시 개인에게 돌아온다. 부정변증법도 그 위대한 업적들을 이룸과 동시에, 개인에게 돌아오게 된다.
어떠한 삶 자체는 변증법적 성격의 원본이다. 개인의 운동-그것이 생물학적이든 사회적이든-은 어떠한 모순이 존재함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 모순이 지양됨과 동시에 또 다른 모순은 그 즉시, 그 모순의 지양됨으로 인해 다가온다. 즉, 부정 없는 삶은 존재치 않으며, 삶은 부정이 있기에 존재한다는-대립물의 상호 의존이라는 변증법의 개념-사유는 우리의 삶 자체가 변증법의 원리를 증명해주고 있음을 나타낸다.
물론 그러한 모순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범위에서 합리성을 지닌다. 사회가 개인에게 행하는 모순은 어디까지나 억압이며, 그 억압을 정당화하고 눈 감는 태도는 벤야민의 기만 개념과 연결된다. 이러한 사유는, 사회적 모순이 존재치 않아도 개인은 그 존재 이유를 지니며 변증법적 삶을 영위한다는 명제를 도출해낸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에서 개념이란-어떠한 포섭과 소외- 지양해야 할 즉자일 것이다. 우리 스스로 개념을 규정한다면, 우리 스스로 우리에게 행하는 억압이 될 수 있으며, 그 억압은 현재의 '나'뿐 아닌 과거의 나를-껍데기만 동일한 타자-기만하는 포섭으로 나아갈 여지가 존재하기에, 개념은 삶에서 존재치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현재, 그리고 모순과 운동 뿐이다.
개념은 전체다. 그 전체는, 우리가 인식한 보이는 존재들이다. 우리의 시야는 뒤를 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