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적 '개인'에 대하여

선형적인 시간관으로부터 프롤레테리아를 해방시키는 혁명

by 민해경

"사유 자체가 일단 소여에 대한 지체 없는 부정성이다." -부정변증법 강의-. T.Adorno, Trans. 이순애



철학은 인간에 대한, 아니 잡히지 않는 진리에 대한 학문이다. 그 진리를 위해 철학은 개인이 아닌 집단의 영역으로 그 발을 넓히고, 순수한 개인의 감각이 아닌 진리를 구성하는 법칙에 대해 연구한다. 그러나, 이 모든 명제는 결국 '한 ein'으로 돌아와야 한다. 아도르노는 그 어느 사상가보다 급진적이었고, 이 체제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자본주의만을 향해 있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억압의 한 형태일 뿐이며, 혁명의 목적은 자본주의가 아닌 억압을 파괴하는 비상상태의 도래라는 벤야민의 사유는 아도르노에게 전승되어, 아도르노의 시선 역시 자본주의가 아닌 그 형태에 감추어져 있는 억압이라는 본질을 향해 있었다.


벤야민은 프롤레테리아라는 문구를 빈번히 사용했지만, 그의 프롤레테리아는 속류주의자들이 경제결정론에 휩싸여 강제로 부여한 '노동계급'의 의미와는 현격한 차이가 존재했다. 벤야민은 물질에 종속당한 그들에게 '무산자'라는 정체성을 되찾아주었으며, 아도르노는 이를 받아들여 해방의 주체를 노동자가 아닌 '민중'이라는 애매모호한 개념으로 설정하기에 이른다. 또한 아도르노의 이러한 사유는 계급이 아닌 개인을 조명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노동 부르주아들이 아도르노를 '부르주아적 수정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여지가 된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철학은 화려한 미사여구와 수식, 복잡한 사상을 딛고 있지만 그 토대는 가장 미시적인 원시인을 위한 형태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과 아도르노가 해방의 주체라는 메시아적 사명을 계급이 아닌 모든 개인들에게 부여했다는 것은 무한한 정당성을 지닌다. 또한 해방이라는 것은 허황되고 공허한 진보의 개념이 아닌, 상례의 중지요, 역사의 급정거라는 지점에서 계급을 불특정의 개인으로 대체한 것은 당연한 처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존재한다. 흔히 '나 ich'라는 단어는 변하지 않는다. 10년의 전에 나와, 20년 후에 나는 동일한 존재이며, 그 형태가 바뀔지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선형적 인간관에 대한 급진적 파열을 이루어야 한다. 위와 같은 논리가 생물학적으로 반박할 수 없는 진리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신체 구조에 노화와 성장이 존재할지라도 그 토양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개인의 의식이며, 그 개인의 기억이다. 그 의식 역시 변증법의 원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변증법의 위대한 발견-사물은 운동한다-은 의식에도 필연적으로 적용되며, 이는 초월적 관념이 아닌 외부의 실재와 개인의 경험에 의해 변화한다. 그 실재는 물질로써, 또 기억으로써, 그리고 자율적인 상부구조로써 현실에 도사리고 있다.


한 개인의 의식은 무한히 변동하고, 그 변동은 다분히 변증법적이므로 '유사함 ähnlich'이 아닌 '상이함 verschieden'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우리는 상이한 본질을 동일한 형태가 감추고 있다는 이유로 그 본질을 '동일하다 gleich'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형적인 시간관으로 '나'를 판단하는 것은 존재론적 오류에 불과하다. 이 파열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반성적 사유는 1인칭의 관점이 아닌 3인칭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이성적인 것이며, 1인칭적 변론의 어구는 다른 범죄자를 변론하는 부르주아적 법조인의 행태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기억을 통제하는 학부모로부터 친권을 빼앗음으로, 기억의 주체성을 되살리는 급진적인 혁명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기계가 아닌 주체적인 아우라적 개인으로 여겨져야 하며, 이는 선형적이고 균질한 시간관으로부터 프롤레테리아의 역사와 존재를 모두 해방시키는 혁명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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