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은 왜 추상으로 남아야 하는가

해방의 추상에 대하여 (1): 맑스와의 비교

by 민해경

해방의 추상에 대하여 (1) 해방의 추상에 대하여 (1)

브런치스토리 작가가 된 이후 벌써 세 번째 연재글을 작성한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추모시와 노무현 대통령 기일에 맞추어 올린 추모글을 더하면 다섯 개의 글을 쓰게 된 것인데, 나의 불규칙적이고 난해한 사유를 타자들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아마 이 공간에서 끊임없이 연재해 나갈 글은 아도르노의 비판 이론과 벤야민의 사유를 생명주의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뿌리를 타고 흐를 것 같은데, 그러한 연재를 위해선 부정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해방의 추상에 대해서 한 번쯤 글을 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부정과 비판이라는 것은 진리치에 부합하는 기준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 일관된 기준이 필요하지만 나의 사유에서 그 기준은 매우 추상적이고 약간은 모순되게도 비동일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독자들이 모호성을 느낄 점이 다분하다고 판단한 점이 그 연유이다.


지난 에피소드에서 말했듯이, 나의 문제의식은 맑스에서 비롯된다.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맑스가 말했던 인간 소외의 문제, 개인 간의 사회적 유대가 무너지고 자본과 물질이 그 유대를 대신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 개인들 사이에 격차가 존재하고 이 격차가 개인들을 규정짓고 억압의 구조로 작동하는 이 현실은 부정의 상태라는 나의 문제의식은 맑스의 사유를 그대로 답습한 듯 유사하다. 그러나 이 문제의식 이후에 차이가 발생한다. 맑스와 나 모두 현 사회가 부정의 상태라는 데에 동의하지만, 맑스는 일부 저서에서 역사는 부정의 사회에서 긍정의 사회로 나아간다고 제시한 반면(예를 들면 새로운 사회는 자본주의의 토양 위에서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예찬의 부분) 나는 지금까지 인류 역사는 부정의 연속이었고, 사회의 변화는 진보가 아닌 기존의 부정이 새로운 부정으로 대체되는 과정이었다는 시각을 견지하기 때문에 맑스와 명확히 대비된다.


또한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하부구조인 물질적 요건에 따라 자본가와 노동자란 두 계급으로 나뉘게 되고, 노동자는 자본가에 의해 착취당하기 때문에 사회를 변혁시킬 잠재성을 지닌 계급으로, 자본가는 노동자에 의해 타도될 운명에 놓인 계급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정(자본)의 반대편에는 반(노동자)이 명확히 존재하게 되는데, 이러한 논리에 따라 자본주의 이후 긍정의 사회를 예견하고 그려나가게 된다. 이에 비해 나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노동자란 집단이 해방의 잠재력을 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적 사유를 지닌다. 또한 이러한 나의 사유는 해방의 잠재력을 내재하고 있는 집단은 특정 계급도, 민족도, 인종 등의 동일화된 집단이 아닌, 비동일자들 그 스스로라고 주장하는 메시아주의와 연관되어 맑스의 계급투쟁 개념을 사실상 해체한다(물론 사회가 이해관계가 상충되고 권력관계가 불균등한 집단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충과 불균등이 해체되는 것이 비로소 해방이라고 보는 시각인 나의 입장에서 특정 계급의 승리는 해방이 아닌 역사의 반복으로 인식된다).


그러기에 나의 사유에서는 비판과 부정 이후에 따르는 구체화된 이성에 개념이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맑스의 입장에선 추상적으로 표현된 [경제학-철학 수고]에서의 해방은 이후 맑스의 여러 저작들에서 계급투쟁 등과 같은 구체화된 표현으로 진화하여 비판과 부정의 기준이 되고 그 이후에 미래를 그리게 하는 이성으로 진화한 것에 비해 나의 이성은 추상적이고, 사변적이고 거칠게 말해 몽상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점이 나의 사유를 해방의 이성으로 이끌며, 비판이란 칼을 무디지 않게 하는 숫돌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구체화는 특정 추상에 대한 개념화와 범주화를 요구하고, 이러한 개념과 범주가 긍정으로 묶인다면 그 순간 동일성과 비동일성은 구분된다. 긍정의 동일성은 다시 비동일성을 부정으로 규정할 것이고, 이에 따라 동일성에 속하지 않는 비동일자들은 억압당하고, 이러한 성격이 사회로 전도된다면 파시즘이 도래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유는 '해방의 추상'위에 기초한다. 구체화된 개념은 해방이란 가면을 쓴 기만의 단어일 뿐이며, 과거의 승자들이 남겨놓은 유산을 물려받은 역사의 왕조일 뿐이다. 물론 맑스의 일부 텍스트와 사유에 대하여 비판을 가해 맑스를 땅에 묻으려는 의도는 없다. 또한, 맑스의 문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맑스가 말년으로 갈 수록 자신이 주창했던 일부 결정론적인 요소와 과학주의적인 이론들과는 상충되는 주장을 내놓는데, 이는 맑스가 자신의 사유를 순수한 이성이자 답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해방을 위한 끊임없는 공부와 탐구를 이어나가는 철학자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해방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맑스가 지적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비판적 사유를 행하는 것이 맑스를 진정으로 살리는 길로 생각할 수 있는 측면도 존재한다.


인류 역사는 해방을 꿈꾸는 비동일자들을 동일자들이 포섭하고 동일화하는 거대한 줄기였다. 승자들은 해방의 개념을 자처하며 이성을 규정했으며, 이는 현재의 사회에 전승되어 비동일자라는 메시아를 파묻으려 하고 있다. 비동일자들은 생존을 위해 동일성을 숭배해야 했고, 자신들의 메시아를 자처했던 자들은 모두 새로운 동일성이 되어 돌아왔다. 그러므로 해방의 추상은 그 자체로 남아야 한다. 그것이 부정과 비판의 이성이며, 그 누구도 전유할 수 없는 비동일자들의 존엄이다.





이번 글에선 맑스와의 비교를 통해 나의 사유에서 왜 이성은 추상으로 남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다루어 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비동일성의 해방, 해방의 추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하나의 글로 완성 짓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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