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동일의 민주주의

해방의 추상에 대하여 (2): 부정변증법의 민주주의

by 민해경



모난 돌의 생존일기와 철학 3화 "이성은 왜 추상으로 남아야 하는가"에 이은 글입니다.




"해방의 추상은 무엇인가, 해방의 추상은 어떻게 이성이 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나와 같은 사유자가 필연적으로 받게 될 질문일 것이다. 모더니즘의 등장 이후 사회를 지배하는 개념이었던 이성에 대해 전면적인 비판을 가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이 이성에 대한 완전한 해체를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해체주의적 입장은 내게 냉소주의, 회의주의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그렇기에, 어찌보면 나의 주장은 양비론으로 보일 여지가 존재한다.


일단, 나의 사유에서 이성에 대해 전개하기 전, 내가 뿌리를 두고 있는 비판 이론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필요하다. 나는 흔히 사람들에게 벤야민-아도르노 전통의 비판 이론가라 주장한다. 벤야민의 메시아주의와 역사철학에 기초를 두며 벤야민의 사유를 통해 아도르노를 해석한다(아도르노가 벤야민에게 영향을 받았기에 비합리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기존 속류 맑스주의(아도르노의 표현)에서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수정주의이며 부르주아적 회의주의이다. 기존 맑스주의는 인류 역사를 하나의 진보 과정으로 인식했고, 이러한 인식은 노예제 사회에 비해 봉건 사회는 진보한 사회이며, 봉건 사회에 비해 자본주의 사회는 진보한 사회이고, 자본주의 사회는 또다른 사회로 진보하게 될 것이라는 그들의 이론과 맞닿는다.


그러나 부정변증법적 사고로 사회를 인식한다면, 인류의 역사는 억압 속에서 구조만 변화해왔을 뿐이다. 사회는 진보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부정의 상태였다. 글에서부터 비교되듯이,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내재하고 있는 비관주의적 요소 때문에 맑스주의자들에게, 또한 여타 좌파 이론가들에게 비판받았다. 그러나 이는 그저 아도르노를 속류 맑스주의로 편입시키려는 정치적 공격이라 나는 생각하며, 이도르노의 이러한 부정변증법은 벤야민의 사유와 맞닿게 될 때, 내재하고 있는 그 잠재력을 폭발한다. 벤야민은 '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국내에선 '역사에 개념에 대하여'로 알려져 있다. '역사철학테제'라는 표현도 쓴다)이란 자신의 문헌에서 역사가 진보한다는 시각은 그저 역사를 공허하고 균질한 시간으로 해석하는 잘못된 태도이며, 지금까지 진보로 여겨져 왔던 문화유산과 역사들은 그저 승자들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전리품이었고, 그 전리품의 이면에는 역사 속에서 지워진 피억압자들의 눈물이 서려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부정변증법을 조명한다면, 아도르노가 비판했던 유물변증법과 헤겔의 긍정 개념은 전리품을 기록한 역사가들의 시각일 뿐이며, 역사는 언제나 부정의 상태였다는 인식은 정당화된다. 그러므로 나의 사유는 벤야민의 사유를 토대로한 부정변증법에 기초하는데, 나는 여기서 하머바스의 공론장 개념을 수용한다. 사실 벤야민은 자신의 대작이었던 파사젠베르크를 미완성 작품으로 남긴채 자살했고, 아도르노 역시 자신이 주창했던 비판적 이성을 부정변증법이란 형태로 남기었지만, 현실에서 이를 펼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보니 아도르노와 벤야민의 사유는 현실과 괴리되어 보였고, 그들의 후신을 자처하는 사유자라면 이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결핍을 하버마스의 공론장과 숙의 개념은 매우 적절히 메꾸어주었다. 하버마스는 개방적인 공론장 내에서 숙의와 토론을 통해 이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주장했는데, 이러한 주장은 나의 사유를 ‘비동일의 민주주의’라는 정치철학적 구상으로 이끌었다. 이 사상은 현대 자유민주주의와 과거의 계급적 민주주의(민주집중제, 인민민주주의 등) 양자를 모두 부정하며, 계급도, 민족도, 그 어떠한 동일성으로도 묶이지 않는 비동일자들이 토론과 숙의를 통해 이성으로 나아가는 사회를 의미한다. 각자의 개성 속에서 공동체의 이성을 추구하는, 맑스가 종종 주창했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과도 놀랍도록 유사한 사회라고도 판단할 수 있다. 물론 하버마스는 자본주의를 인정한 후에 논의를 진행하기에, 나와는 이 지점에서 갈라진다.


비동일의 민주주의에서 핵심은 누구나 공론장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며, 공론장에서 발언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공론장에도 도출된 이성이더라도 언제든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공론장은 정치 분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경제, 사회 등 전 영역에서 작동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를 정치적 의사결정권에 국한시키고, 심지어 대의제라는 명분으로 그 의사결정권마저 박탈하다시피 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란 탈을 쓴 자본주의 하에서의 금권주의, 특정 계급의 민주주의를 주창하며 동일성을 경외하는 계급적 민주주의 모두 비판과 부정의 대상이다. 또한 비동일의 민주주의 역시, 동일성의 유혹으로부터 흔들림 없는 태도를 견지해야 하며, 언제든지 자신 역시 부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벤야민의 말처럼 역사 속에 비동일자들과 지금의 비동일자들이 초현실적인 시간에서 만나 사회에 중심에 서는 것, 아도르노의 말처럼 지금까지의 역사는 부정의 상태였고 그 부정에 대한 비판을 통해 비동일성의 존엄함을 지키는 것, 하버마스의 말처럼 모두가 공론장에 모여 숙의하고 토론하며 이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비동일의 민주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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