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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보다 앞선 색의 이야기

지난날에 사계채의 언덕을

by 실크로드

<바람보다 색이 먼저 불던 날

훗카이도 여행 셋째 날, 세 번째 무지개 편>

크리스마스트리 나무 아래에서 두번째 쌍무지개를 본 우리는,이번엔 사계채 언덕으로 향했다.

약간 흐릿한 날씨가 오히려 더 근사하게 느껴졌다.

창문을 열고 달리는 기분, 괜히 두근두근.

같은 순간에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는 건

가끔은 어렵고, 가끔은 신나고…

정말, 말로 다 설명하긴 어렵다.


이젠

셋.

여하튼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신난다.”

그 말이 절로 나왔다.

여행의 셋째 날이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가벼워졌다.

입구에 작은 푸드 코너를 지났다.

모양새만 봐도 전형적인 관광지 푸드.

감자 고로케를 하나 샀다.

겉은 바삭, 속은 부드럽지만

‘이게 바로 일본의 맛이다!’ 하고 외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그렇듯 말했다.

“이런 게 진짜 여행이지.”

그리고, 이름 없이 무언가 27% 부족한 듯한 아이스크림도 하나.

굳이 이유가 없었다.

그저 북해도에서 아이스크림은

무조건이니까.

언덕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먼저 불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언덕에 닿기도 전에,

먼저 마음을 흔든 건 꽃들의 색이었다.

멀리서부터 빨강, 노랑, 보라, 흰색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고

언덕을 따라 이어진 꽃들은

말없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색이, 바람보다 먼저 분다.’

웨딩촬영하는 예비신랑부부도 보이고

관광객들이 꽤 많았지만

사계채 언덕은 생각보다 훨씬 조용했다.

사람들은 왠지 말이 없었다.

마치 꽃들에게 대신 말하게 맡긴 것처럼.

누구 하나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그 풍경은 이미 충분히 말을 하고 있었다.

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문장이지만,

그곳에선 이상하게도 믿을 수 있었다.

그 순간, 다시 생각이 들었다.

“이 언덕에선, 바람보다 색이 먼저 분다.”

색이 먼저 마음을 건드리고

그제야 바람이 스친다.

꽃잎이 가볍게 흔들릴 때마다

내 손끝도, 아주 조금 따라 반응했다.

내가 천재 작곡가는 아니지만,

그 순간, 무언가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2악장 위에

무지개 선율 하나를 더 얹듯이.


깊고 넓게.

고요한 속삭임 같은 언덕을 뒤로하고

주차장에 도착했을 즈음,

우리는 무지개를 또 마주했다.

이번 여행에서 세 번째 무지개였다.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찡해졌다.

차에 타기 전, 잠시 숨을 고르던 순간이었는데—

“또 떴다, 무지개!”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익숙한 듯, 하지만 더 단단한 눈빛으로.

이번엔 탄성 대신 확신이 있었다.

약속을 떠올렸다.

그냥, 신뢰하고 가기로.

감탄은 처음만큼 크지 않았지만,

그 깊이는 더 짙어졌다.

꽃 한 송이, 무지개 하나,

그리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 하나.

여행 셋째 날도 그렇게 소중했다.

우리는 그날

무게로는 재지 못할 어떤 것을 얻었다.

“그게 뭐야?” 묻는다면

<믿음 자라기> 라고 말하겠다.


우리 부부는 지난 날의 약속을 붙잡아 나아갈 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면서도

단단해져야 한다.

아기가 이앓이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지금, 여기 이 시간 속에서도,

하늘 아버지의 약속을 기억하며 경작해간다.

언덕 위 무지개처럼,

그 약속도 우리 곁에 계속해서 선명히 머물기를.​

그리고,

우리 부부의 가장 큰 자산인 이 작은 셋째날 이야기를

이렇게 조심스럽게 접는다.

다음 장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또한 기다릴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함께 바라본 무지개,

함께 지나온 언덕,

그리고 함께한 하루가 있으므로.

그건 곧,

살아 있다는 것의 조용한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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