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 귀족가 후예가 우리 회사에 이력서를 냈다

우린 그가 누군지 모른다

by 문현웅

이력서에 적힌 이름이 자못 낯섭니다. 검색해 보니 중세 유럽에서 발흥했던 귀족 가문의 성씨라 합니다. 물론 요즘에야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공부하다 직장까지 얻는 경우가 그리 드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에 적힌 글줄 행간에선 한국 문화권에서 나고 자라온 네이티브의 향기가 짙게 풍겨옵니다. 정말 출생신고를 서유럽에서 한 친구라면 암만해도 이렇게까지 구수하긴 어려울 듯한데요.


아니나 다를까, 인사과에서 확인한 결과, 역시나 지원자는 카페 왕조 시절 융성했던 귀족 집안의 후예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반도에서 태어나 평생을 휴전선 밑에서 지낸 오리지널 한국인이었습니다. 다만 이력서에 호적상의 성명이 아닌, 인터넷에서 주로 쓰는 닉네임을 적었던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나는 작품 대부분을 그 닉네임으로 활동하며 제작하고 선보였기 때문에 본명은 의미가 없으며, 오로지 닉네임을 써야만 아이덴티티를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합니다.


0101.jpg 카페 왕조 전체를 상징하는 문장. 카페 왕조는 987년 위그 카페가 왕위에 오른 이래 1848년까지 이어진 프랑스의 왕조입니다./위키피디아 유저 Sodacan 제작




이 무슨 해괴한 촌극인가 싶을 수도 있으나, 사실 웹툰 작가나 일러스트레이터 등 미술 계통 인재를 채용하는 업계에선 이따금 실제로 마주하는 상황이라 합니다. 앞선 사례에 언급된 항변처럼, 성명보다는 닉네임 쪽에 자아 정체성이나 사회적 명망이 응축됐다 믿는 분들이기에 벌일 수 있는 일이죠.


그러나 정작 그들을 채용할 분들은 업계에 발을 담근 적이 없을 확률이 높습니다. 회사 성향이나 정책에 따라 아트 디렉터나 동료 원화가를 대동해 면접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는 인사과 직원들과 고위 임원이 선발 과정의 시작과 끝은 물론 평가 절차 대부분을 도맡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도 거의 모두가 지원자의 성명은 물론 닉네임 또한 어차피 모를 테죠. 즉, 아이덴티티를 강조할 목적으로 실명 대신 닉네임을 적어 본들 웬만해선 딱히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0102.jpg 지난 2011년에 거행했던, 합스부르크 제국 마지막 황제의 아들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 대공의 장례식 中./오스트리아 공영 방송(ORF), 유튜브 채널 ‘Rolitabun’에서 자막


오히려 이처럼 성과 이름 대신 닉네임만 덜렁 써내는 행위는, 이력서를 곧장 파쇄기에 던져 넣은 기업 측에서 ‘서류 미비로 인한 불이익은 지원자 본인의 책임’이라 항변할 명분만 줄 수 있습니다. 반대급부로 기업이 닉네임을 인정하지 않고 성명 기재만을 요구하는 것은 법적으로도 문제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채용절차의 공정성 확보를 위해 고용노동부가 직무와 직접 관련이 있는 요소만 뽑아 정리한 ‘표준이력서 및 자기소개서 양식’에서도, 성명은 필수라 인정받는 정보 중 하나니까요(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제5조 ‘기초심사자료 표준양식의 사용 권장’ 관련).


0103.jpg 고용노동부가 제공하는 표준이력서(안) 및 자기소개서. 여기에서도 지원자 성명은 필수항목으로 규정돼 있습니다./고용노동부




사실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 정부 정책 자체는 점차 실명 노출과 활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긴 합니다. 최근 활발하게 거론되는 ‘가명정보’가 주요한 대안 중 하나죠. 가명정보는 개인 비식별 조치가 된 익명 개인정보와 식별 가능한 개인정보 사이의 중간 단계로, 성명이나 전화번호 등 특정 인물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를 삭제하거나 대체(가명처리)하는 등의 방법으로 식별 가능성을 낮춘 개인정보를 말합니다. 이를 잘 응용하면 지원자에게 성명 제출을 요구하지 않고도 그의 이력과 포트폴리오 등을 열람하는 것이 가능할 테죠. 실제로 지난 14일 국무총리 소속 합의제 행정기관인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2021년 제2회 개인정보보호 정책협의회'를 개최해 가명정보 제도 개선을 논의하는 등 도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요.


0104.jpg /행정안전부 웹툰 ‘개인정보보호법 통과, 어떤 모습들이 달라질까?’ 中


하지만 가명정보를 자유로이 쓰려면 많은 공력을 들여 정보 유출과 사생활 침해 등을 방지하는 안전장치를 마련해 둬야 하며, 이 때문에 대다수 기업이 이를 실무에 활용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입니다. 게다가 언젠가는 이력서에 성명을 적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올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서 대신해 닉네임을 요구받는 상황이 도래할 듯하지도 않고요.


그러니 어느 모로 보아도 입사 지원에 닉네임을 사용했을 때 기대할 만한 이익은 사실상 없으며, 도리어 서류 단계에서부터 걸러질 빌미만 제공하는 꼴이 될 수 있으니, 웬만하면 이력서엔 성과 이름을 바르게 적어 내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합니다.



*이 글은 THE PL:LAB INSIGHT에 업로드한 아티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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