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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웅 Aug 13. 2021

올림픽에 '도박' 종목이 유지되는 이유

구태는 왜 이어지는가

지난 6일 2020 도쿄올림픽 근대 5종 여자 개인전에서, 지난 올림픽 때 같은 종목에서 4위를 차지했던 독일 선수 아니카 슐로이(31)가 승마 종목 0점을 받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승마 전까진 펜싱과 수영 종목을 아울러 선두를 달렸던 슐로이는 단숨에 결선 진출자 36명 중 31위로 내려앉았습니다. 레이저 런에서 상당한 분전을 했지만 경기를 완전히 뒤집을 순 없었고, 슐로이는 결국 최종 순위 18위로 대회를 마감했습니다.


사실 일이 이 지경이 되는 데에 슐로이 선수가 범한 잘못은 딱히 없었습니다. 단지 그가 받은 말이 기수의 지시를 깡그리 무시했을 뿐이었습니다. 올림픽 근대 5종 중 승마 종목엔 평소 선수와 호흡을 맞추던 말을 데려올 수 없습니다. 대신 주최 측이 추첨을 통해 배정한 말을 20분 동안 어떻게든 달래고 파악해 경기에 나서야 합니다. 컨디션이 나쁘거나 성격이 맞지 않는 말을 받으면 무관하게 좋은 점수는 기대하기 어려워집니다. 선수 기량과는 무관하게 말이죠.


6일 2020 도쿄올림픽 근대 5종 여자 개인전 당시 독일 대표 아니카 슐로이 선수의 지시를 거부하는 프랑스산 경주마 ‘세인트 보이’./PA Media


슐로이가 배정받은 프랑스산 경주마 ‘세인트 보이’는, 앞서 러시아 올림픽 위원회(ROC) 소속 선수인 굴나즈 구바이둘리나(29)가 올라 탔을 때도 점프를 거부해 0점 처리를 당하게 했던 말이었습니다. 그는 슐로이를 태우고서도 다섯 번째 장애물 도약을 거부했습니다. 세인트 보이를 어르다 지친 슐로이가 울며 텅 빈 경기장을 도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만 갔습니다. 경기가 끝난 뒤 슐로이의 코치인 킴 라이스너는 분을 참지 못하고 말 엉덩이를 주먹으로 후려쳤다가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단신으로 사람 셋을 몰아낸 세인트 보이는 이어 열린 남자 개인전 경기엔 출전하지 못했다 합니다.


이번 대회에서 사고를 친 말은 세인트 보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크리스트발 21은 이탈리아 선수 엘레나 미첼리(22)를 두 차례나 떨구고선 장애물을 그대로 지나쳤고, 유력한 메달 후보로 꼽히던 아일랜드 선수 나탈리아 코일(30)은 그를 태운 말인 콘스탄틴이 점프를 하지 않는 바람에 4위에서 19위로 추락했습니다. 브라질의 이에다 기마랑이스(21) 선수도 칼레안시에나 YH에서 낙마하며 점수를 받지 못했습니다.




선수의 기량을 4년, 아니 5년 만에 단 한 번 기회로 평가하는 이토록 중대한 자리에, 어째서 ‘말 뽑기' 같은 도박적인 요소를 굳이 박아 넣은 것일까요. 그것은 근대 5종이라는 종목 자체의 기원과 연관이 있습니다.


근대 5종을 고안해 하계 올림픽 종목 중 하나로 도입한 이는, 다름 아닌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1863~1937) 남작이었습니다. 열렬한 애국자로서 프랑스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까지 했던 쿠베르탱은, 나폴레옹 전쟁 시절 군령을 전하고자 적진을 돌파했다는 조국 군인의 영웅담에서 영감을 얻어 근대 5종 경기 시스템을 만들었다 합니다. 실제로 5종 경기는 가까운 적을 칼로 제압하고(펜싱), 강을 헤엄쳐 건너(수영), 적의 말을 빼앗아 타고(승마), 먼 거리의 적은 총으로 제압하면서(사격), 달려서 적진을 돌파하는(크로스컨트리) 등 군인의 업무 수행 과정을 스포츠 형태로 반영한 흔적이 역력하죠.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IOC 홈페이지


그 중 승마의 핵심은 ‘적의 말을 빼앗아 타고’입니다. 전장에서 말을 노획하는 과정이 없다면 근대 5종의 정신을 온전히 살릴 수 없다는 것이죠. 이 때문에 종목이 생겨난 이래 감히 헤아리기가 버거울 정도로 숱한 낙마 부상자와 억울한 탈락자가 속출했음에도, 난생처음 마주한 말과 상견례를 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경기를 치르는 방식은 바뀐 바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쿠베르탱이 살아 있을 적에는 문제가 덜한 편이었습니다. 그때야 아직 군마(軍馬)가 드물진 않던 시절이라 경기에 동원할 말도 비교적 흔했고, 당시엔 말을 채찍으로 다루는 행위를 허용했거든요. 애초에 남의 말을 강제로 복종시키고 타는 것이 컨셉이니, 나름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군마는 차츰 도태됐고, 사람이 타며 경주를 할 만큼 훈련된 말은 굉장히 희소해지며 몸값 또한 천정부지로 치솟았죠. 이를테면 지난 2004 아테네 올림픽 당시 말 한 마리 당 보험료는 4000만원 안팎으로, 사람 보험료 대비 1000배 가까운 액수였습니다. 그런 판에 남의 귀한 말에 채찍질을 할 수도 없으니, 말채찍은 점차 말에게 보이거나 소리를 내 겁을 주는 용도로만 한정해 쓰게 됐고요. 거기에 동물권의 성장까지 더해지며 명령을 거부하는 말을 채찍으로 다스리는 것은 완전히 옛 시절 이야기가 돼 버렸죠.


함께 뛰어야 할 파트너가 빼앗아 탄 적군의 말보다 지휘 통제가 어렵다 보니, 기록 수립은커녕 사고를 당하는 선수도 종종 있었습니다. 지난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엔 카자흐스탄 대표로 여자 근대 5종 경기에 출전했던 갈리나 돌구시나(40) 선수가 경기 도중 그녀가 탑승했던 말인 D252가 넘어지며 머리부터 지상으로 추락하는 사고를 겪었습니다. 돌구시나는 치명상을 입진 않았으나 광저우 뱌오저오 승마클럽에서 제공한 말이었던 D252는 목이 부러져 안락사 조치를 당했습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때도 말이 흥분하는 바람에 남자 근대 5종 한국 대표 황우진(31) 선수가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고요. 지난 2003년 3월 옌스 켈름, 프랭크 알헬름, 베르너 피치 등이 공저한 “Sports Injuries, Sports Damages and Diseases of World Class Athletes Practicing Modern Pentathlon” 논문에 따르면 근대 5종 대회 동안 부상을 입은 선수 대부분은 승마 도중 다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경기 도중 부상을 입은 돌구시나 선수(위)와 목이 부러져 후송당하는 말 D252(오른쪽 아래)./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홈페이지


그럼에도 근대 5종이 올림픽 무대에서 사라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 쿠베르탱 남작이 생전 “근대 5종 선수만이 진정한 '올림피언'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고 천명한 데다, 그 유훈을 이어받은 IOC(국제올림픽위원회)는 위원장이 근대 5종 메달을 직접 시상할 만큼 종목의 위상을 높이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대에 맞지 않거나 위험한 관행을, 개선의 여지가 있음에도 오랜 전통이라거나 창업자 혹은 선대의 뜻임을 내세우며 고수하는 사례는 기업에서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입으로는 혁신을 외치며 고치는 시늉을 하는데도 정작 손대야 할 핵심은 고집스레 유지되는 경우도 상당하죠. 본디 공기권총을 사용했던 근대 5종의 사격 부문이 종목 저변 확장을 이유로 일반인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레이저건으로 바꿨음에도, 정작 가장 논란이 많은 승마의 원칙만큼은 건드리지 않고 전통을 이어가는 것처럼요.


사실 IOC라고 문제를 몰라서 방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아도 손댈 수 없는 어른의 사정이 있을 뿐이죠./2020 도쿄올림픽 홈페이지


예를 들면 지난 2018년 5월 대한상공회의소와 맥킨지가 공동으로 대기업 직장인 2000여명을 조사해 ‘한국 기업의 기업문화와 조직건강도 2차 진단 보고서’를 발표했는데요. 2년 전 1차 조사 때 지목된 후진적 기업문화 요소들을 개선할 목적으로 벌인 혁신이 성과가 있었는지를 묻는 질문에 59.8%가 ‘일부 변화는 있으나 개선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답했고, 28%는 아예 '이벤트성으로 전혀 효과가 없다'고 응답했습니다. 알맹이는 그대로고 껍데기만 수선하는 척하는 쇼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이죠.


당시 대한상의는 국내 기업문화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4대 개선과제로 '빠른 실행 업무프로세스', '권한과 책임이 부여된 가벼운 조직체계', '자율성 기반의 인재육성', '플레잉코치형 리더십 육성'을 제시했습니다. 구체적으론 기존의 '체계적 전략 기반 실행' 프로세스를 빠른 실행에 중점을 둔 '시행착오 기반 실행' 모델로 변경, 효율성을 강조한 기존의 기능별 조직구조를 통합해 권한과 책임이 모두 부여된 '소규모 자기완결형'의 가벼운 조직으로 전환, 승진·보상 위주의 인재 육성을 주인의식·자율성을 기반한 내재적 동기부여 방식으로 개편, 탑다운 방식의 관리자형 리더십을 구성원들과 함께 뛰며 업무를 지원하는 '플레잉코치형 리더십'으로 바꿔야 한다고 조언했는데요. 3년여가 지난 지금 이러한 ‘개혁’이 실제 기업 업무 현장에선 어떤 방식으로 진행됐는지는 현업에 계신 여러분들께서 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거듭되면 언젠가는 불만과 반발을 도저히 봉합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 마련입니다. 근대 5종만 해도 최근 알폰스 회어만 독일 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규칙 변경 검토를 요구했다 합니다. 회어만 위원장은 "규칙을 기수와 말이 보호되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며 "동물의 안녕과 선수 사이의 공정한 경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말을 듣지 않는 말의 목을 치는 진짜 전시 상황 구현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말을 갈아탈 수 있게 해주는 융통성 정도는 필요하다는 것이죠.


기업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인 HR연구소는 “분야를 불문하고 계속해 불거지는 문제를 근본적인 변화 없이 영원히 덮고 갈 방법은 없다”며 “기업 문화에서 드러나는 구태나 병폐는 결국 언젠간 치료를 해야 하며, 외면하지 않고 가급적 빨리 대응하며 고치는 것이 장기적으로도 현명한 방책이다”고 했습니다.



*이 글은 THE PL:LAB INSIGHT 업로드한 아티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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