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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웅 Jan 27. 2022

이메일이 500마일 넘는 곳엔 가질 못하더라

진짜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구글과 아마존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했던 트레이 해리스가, 모교인 노스캐롤라이나대 채플힐에서 이메일 서비스를 운영하던 시절 겪은 일이라 합니다.


“학교 외부로 메일을 발송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500마일(약 805km), 정확히는 520마일 넘는 곳으로는 이메일을 보낼 수가 없어요.”


어느 날 해리스는 통계학부 주임교수로부터 이와 같은 문의를 받았습니다. 그는 적잖이 당황했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았습니다. 때는 Y2K가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공연히 나오던 199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컴퓨터도 아니고 통계학을 전공한 교수라면, ‘이메일’이라는 기술의 원리 자체를 착각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던 시대였죠. 하지만 그런 단순한 상황은 아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지리통계학자들에게 물어봤는데요.”


“지리통계학자들이요...”


“네, 그분들께서 이메일 발송 범위를 지도 위에 반경으로 그린 결과, 실제로 500마일을 약간 넘는 범위에선 도달 실패가 뜨더군요. 반경 내에서도 미도달 지점이 이따금 나오긴 했지만, 아무튼 500마일 조금 넘는 곳에는 무조건 발송이 되지 않았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언제부터 이런 문제가 생겼나요?”


“얼마 전 컨설턴트가 와서 서버를 패치하고 재부팅을 했습니다. 그분께 전화해서 물어봤는데 메일 시스템은 전혀 만지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알겠습니다, 확인 후 다시 전화 드리죠.”


‘터무니없는’ 통계학과 교수의 불평은, 오래지 않아 사실로 판명됐습니다. 해리스가 직접 메일 발송을 테스트하는 상황에서도 500마일을 약간 넘는 곳에선 발송 실패가 뜨는 현상이 어김없이 재현됐습니다. 프린스턴(400마일)에는 문제없이 전송되던 메일이 멤피스(600마일)엔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뉴욕(420마일)은 수신에 성공했지만 프로비던스(580마일)는 실패했습니다. 설정을 아무리 뒤져도 ‘500마일_이상_전송_불가’ 제한을 걸어 둔 흔적은 없었습니다. 정말 ‘물리적 거리’가 이메일 도달 범위를 규정했던 것일까요?


그때 해리스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교수가 말한 최근의 ‘서버 패치’에선, 업그레이드뿐 아니라 다운그레이드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앞선 버전에서 설정한 내용 중 일부는 별도 지정을 하지 않는 이상 일괄 ‘0’으로 잡혔다 합니다. 그러한 항목 중 하나엔 ‘대기시간’이 있었고요.


/게티이미지뱅크


대기시간은 원격 SMTP(인터넷에서 전자우편을 보낼 때 이용하게 되는 표준 통신 규약) 서버에 접속할 때 발생했으며, 0으로 설정된 경우엔 3밀리초를 조금 넘기면 실패로 처리됐습니다. 그리고 해리스는 이메일이 3밀리초 이내에 도달 가능한 거리를 계산해 보았습니다.


$ units
1311 units, 63 prefixes


You have: 3 millilightseconds
You want: miles
* 558.84719
/ 0.0017893979


그렇습니다. 3밀리초 내에 도달 가능해 실패 처리가 뜨지 않는 구간은, 거리로 환산하면 약 559마일 남짓이었습니다.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공간’이 아닌 ‘시간’에 있었던 것입니다.




시장이나 고객이 주는 시그널을 애써 외면하는 회사는 거의 없습니다만. 그렇다 해서 그들이 받아들이는 모든 신호를 제대로 해석하고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앞서 언급한 일화처럼 기업으로 전송되는 니즈나 이슈는, 막상 파악을 하고서 보면 실제 가리키는 방향이 겉보기와는 전혀 다를 수도 있거든요.


또 다른 헷갈리는 시그널의 사례로, 일본의 음료 회사 산토리(Suntory)가 지난 2000년 출시했던 스포츠음료인 ‘DAKARA’의 마케팅 전략 수립 건을 들 수 있겠습니다. 당시 산토리는 오츠카제약의 ‘포카리스웨트’와 일본코카콜라의 ‘아쿠아리스’가 90% 넘게 장악한 일본 스포츠음료업계에 후발 주자로 진입하기 위해 제품 개발팀을 세우고 시장 조사를 했는데요.


당시 경쟁자들은 모두 ‘현대인의 미각에 맞는 본격적 스포츠음료’ 컨셉을 내세우고 있었으며, 산토리가 직접 실시한 정량 조사에서도 고객 답변 중 76%는 스포츠음료를 주로 운동할 때나 운동 후 마신다고 답변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사실 산토리가 이 데이터를 처음부터 의심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시장의 니즈는 이렇다지만, 그 분야는 이미 오츠카제약과 일본코카콜라가 꽉 잡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새길을 찾는 것이 낫겠다’는 취지에서, 정량 조사 결과를 제쳐두고 구매 현장으로 나가 새로이 심층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뜻밖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고객 대다수가 설문으로 제출했던 답변과는 달리, 실제 필드에서 확인된 바로는 스포츠음료를 일할 때 마시거나 숙취 해소 음료 대용으로 사용하는 빈도가 훨씬 높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고객들이 설문에서 엉뚱한 대답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응답자들이 산토리를 일부러 속이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답변에 응할 때 자신의 실제 행동을 돌아보는 대신, 이미 시장에 형성된 스포츠음료의 기존 이미지를 그대로 옮겨 적었던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즉, 본인이 스포츠음료를 어떤 때에 섭취하는지를 정확히 복기하기보단, ‘스포츠음료라면 응당 이럴 때 마시겠지’라는 이미지와 관념에 기대 답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산토리는 심층 조사 결과를 토대로 제품 컨셉을 재정립했습니다. 마케팅 방향도 ‘현대인의 생활을 지켜 주는, 의지할 수 있는 신체 균형 음료’로 잡았습니다. 광고에선 운동 후 ‘마시는’ 장면 대신, 인형들이 ‘배설하는’ 장면을 내세웠습니다. 그 결과 DAKARA가 시장에 안착한 것은 물론, 일부 조사 결과에선 포카리스웨트를 앞지르는 등 상당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사람인 HR연구소는 “시장의 시그널과 VOC는 입체적이며, 겉으로 볼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숨은 속내를 담긴 경우가 많다”며 “전송되는 신호를 바로 눈에 보이는 대로만 해석하려 들지 말고, 늘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하며 분석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심지어는 발송자조차 인지하지 못한 정보와 데이터가 있는지를 파고들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글은 THE PL:LAB INSIGHT 업로드한 아티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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