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방
눈을 떴을 때, 나는 아무런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그곳은 마치 새벽과 황혼이 동시에 머무는 회색의 틈 같았다.
나는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고, 머리는 희뿌연 천장을 향해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을 들이쉬는 소리조차 내 의지 없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 적막함이 무섭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익숙했다.
몸을 일으키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팔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고, 어딘가 저릿했다. 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방은 흰 벽이었다. 창문은 없었고, 문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바람이 느껴졌다. 아주 미세한, 존재감조차 흐릿한 바람이었다.
내 앞에 갑자기 누군가가 섰다. 발소리도 없이 다가온 그 존재는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작고 가녀린 실루엣. 황금빛 곱슬머리와 희고 얇은 드레스, 그리고 맑고 투명한 눈동자. 그 눈을 보는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찔렀다.
무언가… 잊고 있었던, 하지만 절대 잊지 말았어야 할 것 같은 감정이었다.
"일어날 수 있어?"
소녀가 조용히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노래 같았다. 진짜 노래가 아니라, 숨결처럼 부드럽고 일정한 음률을 가진 속삭임.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작고, 말라 있었지만 왠지 믿음이 갔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마치 전기가 흐르듯 짧은 충격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동시에, 잊고 있던 기억들이 스쳐 갔다. 무대, 불빛, 관객들의 숨죽인 눈빛, 그리고 나의 노래. 소녀의 목소리. 내 목소리. 그리고, 어느 날 마신 찻잔의 쓴맛.
그날, 나는 죽었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손을 떼며 한 발짝 물러섰지만 소녀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엔 연민도, 두려움도, 기대도 없었다. 단지, ‘기억’만이 있었다. 나를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너는… 나야. 그렇지?"
내가 묻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다만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다른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조금 더 무겁고, 뚜렷한 소리였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안개를 뚫고 또 하나의 존재가 걸어왔다. 아직 작고 여린 아이였다. 아코디언을 품에 안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불안정했다. 그는 소녀를 보더니, 그리고 나를 보더니,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우리 곁에 천천히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작게 아코디언을 눌렀다.
짧고 낮은음 하나. 곧 이어지는 맑은 화음. 그 음을 듣자 이번엔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코디언 소리였다. 분명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소리. 내가 만들던 그 리듬. 내가 지겨워하며, 그러나 벗어날 수 없던 그 곡조.
그것은 나의 것이었다.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이 차올랐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 아이 또한 나였다. 다른 시간의 나, 다른 기억의 나.
셋이 함께 있는 공간은 더는 낯설지 않았다. 이상하게 따뜻했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밀려오는데도,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 안정이 되었다.
"우린… 죽은 거겠지?."
나는 말했다. 말하고 나니 이상하게 후련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코디언 아이는 작게 눈을 감았다.
"근데… 왜 다시 깨어난 거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멀리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성인 여성이었다. 긴 생머리에 다 타버린 듯한 눈빛, 조심스레 걸어오며 우리를 관찰했다. 그녀는 멈춰 서더니 작은 숨을 내쉬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 너희도 있구나. 나 혼자인 줄 알았어."
그녀는 술집에서 일을 했었다고 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였다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나이부터였다고. 쳇바퀴처럼 같은 하루, 같은 사람, 같은 공기. 그러다 결국 무너졌다고.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말하는 모든 단어가 이상하게 우리 몸속을 흔들었다.
아니, 내 몸을.
그녀 또한 나였다.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퍼즐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나였다. 서로 다른 얼굴과 이름을 했지만, 이 고통을 모두 겪은 ‘나’였다.
이곳은 어디일까. 죽은 이들이 모이는 곳? 환생 전의 대기실? 아니면, 자아의 심연?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 [왜?]
왜 우리는 여기로 모였는가. 누가 이 모든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가.
그러다, 공간의 구석에서 누군가 웃었다. 희미하고 날카로운 웃음.
우리 모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한 사람이 있었다. 아니, 인간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존재였다. 무언가 흐릿하고 번진 얼굴, 웃고 있는 입,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는 눈.
"재미있군. 네가 나를 알아볼 줄이야."
그가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그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았고, 이곳으로 이끌었으며, 끝내 우리가 만나게 된 이유였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사실.
그조차도… 나였다.
나는 무너졌다. 그러나 동시에 서서히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끝이 아니었다.
이제야, 진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