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였고, 나는 너였어

익숙한 울림

by 월하연

그날 이후로 시간이라는 개념은 사라졌다. 해가 뜨지도 지지도 않았고, 시계도 없었으며,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지쳤다. 아주 깊은 피로가 몸을 감쌌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공간은 처음보다 조금 넓어진 듯했다. 벽이 멀어진 건지, 아니면 우리가 벽 안에 있던 걸 잊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이름을 몰랐고,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호칭을 붙여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저 ‘아이’, ‘소녀’, ‘여자’, ‘그’라고 불렀다. 모두가 한 몸이라는 걸 느끼면서도, 아직은 서로를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가끔씩 누구 하나가 오래된 기억을 꺼내면, 나머지 사람들은 조용히 그 이야기를 들어줬다. 그중에서도 아코디언 아이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고, 노래 소녀는 단 한 번도 노래하지 않았다. 술집 여자만이 종종 낮은 목소리로 담배를 피우는 흉내를 내며 중얼거렸다. 손끝엔 담배가 없었지만, 공기엔 그 냄새가 맴도는 듯했다.


그날, 우리는 넷째 인물을 만났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공간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그가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를 보자마자 나는 이상하게 편안해졌다. 그 아이는 말라 있었고, 눈빛은 너무 평범해서 이상할 정도로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그 조용함이 너무 깊어서, 어떤 소리도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언제부터 있었어?”


내가 조심스레 묻자, 그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 이렇게 말했다.


“여기 있었어. 계속. 아무도 몰랐을 뿐이야.”


그의 목소리는 마치 낡은 라디오 같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잡음 섞인 신호. 단어 하나하나가 너무 오래 방치된 감정처럼 느껴졌다. 그를 바라보며 나는 알았다. 그는, 잊힌 나였다. 아무런 이름도, 흔적도 없이 조용히 사라졌던 삶.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았던 존재.


그는 일어나더니 손을 뻗어 허공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갑자기 작은 책상이 생겨났고, 그 위에 낡은 녹음기가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조심스레 틀었다. 지지직거리는 소음 뒤로, 흐릿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무슨 꿈을 꿔? … 나는 없어. 그런 거…』


『하루가 가는 걸 느껴본 적 있어? 나는 잘 모르겠어. 그냥, 자고 일어나면 또 자야 하고…』


『누가 날 찾을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는데… 아냐. 아무도 없어. 그걸 알아버린 뒤엔 더는 꿈도 안 꿨어.』


나는 숨을 멈췄다. 그 목소리는 바로 나였다. 잊고 있었던 또 다른 내가, 그 안에서 살아 있었다. 아무 존재감 없이, 그저 공기처럼 흘러간 나.


그때, 우리 사이에 울림이 생겼다. 누군가가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렸다. 고개를 돌리자 노래 소녀가 입을 열고 있었다. 그토록 노래하지 않던 아이가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 나의 노래가 너의 기억을 부를 수 있다면. 내 목소리가 너의 고요를 깨울 수 있다면…”


그것은 마치 주문 같았다. 서툴지만 진심이 담긴 소리. 음정도 불안하고, 박자도 일정하지 않았지만, 그 노래는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던 기억과 어우러져 하나의 선율이 되었다.


그 순간, 우리 모두는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의 상처는 제각기 다르지만, 결국 모두 같은 부위에 남아 있다는 것을. 같은 심장에, 같은 목에, 같은 등에.


그때였다. 우리가 깨어났던 첫 벽 너머에서 또 다른 존재가 걸어왔다. 그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그림자’와는 달랐다. 키는 크고, 어깨는 넓었으며, 발걸음에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양손은 피로 물든 붕대로 감겨 있었다.


그는 우리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는, 너희가 되지 않기 위해 싸웠던 나야.”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나도 너희가 되었지. 그리고 이제야 알게 됐어. 우린 모두,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살았던 거야.”


그는 조심스레 주머니에서 작은 피리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입에 물고, 아주 짧고 조용한 음을 불었다. 그 소리는 작았지만, 우리 모두의 심장을 찔렀다. 피리가 울리자, 우리 안에 있던 또 다른 감정이 깨어났다.


그것은 분노였다. 슬픔이 아닌, 분노.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방치했던 시간들에 대한 분노. 기억하려 하지 않았고, 이해하지 않으려 했던 모든 나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그 감정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조금씩 다가갔다.


이제, 우리는 서로를 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날 이후, 공간은 더 이상 조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말했고, 노래했고, 울었고, 웃기도 했다. 그리고 아주 가끔, 서로의 손을 잡기도 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점점 더 많은 나들이,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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