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였고, 나는 너였다

심연을 부른 목소리

by 월하연

그날 이후로 우리는 한순간도 조용히 머무를 수 없었다. 감정이 흐르기 시작하자, 그곳은 더 이상 고요한 방이 아니었다. 마치 오래된 저수지에 돌멩이를 던진 듯,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물결이 일렁였다.


그리고 그 물결의 중심에서, 우리는 또 다른 나를 만났다.


그는 어두운 구석에서 조용히 우리를 보고 있었다. 처음엔 그의 존재조차 감지되지 않았다. 그림자와 하나가 되어, 공간의 일부처럼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노래 소녀가 멈춰 서서 그쪽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입술이 떨리는 것을 보며 우리도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 누가 있어.”


소녀가 말했다.


그림자는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오래된 기계가 녹슨 관절을 움직이듯, 삐걱이며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형체가 드러났다.


그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의 절반은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그 속엔 아무런 빛도, 감정도 없었다. 살아 있다는 증거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죽이던 나야.”


그의 말은 칼처럼 날카로웠고, 동시에 너무도 평온해서 더 무서웠다.


“전쟁터에서, 명령을 따랐고, 망설임 없이 칼을 들었고, 누군가를 죽이는 데에 익숙해졌지. 그러다… 어느 날, 그게 나 자신이었다는 걸 알았어.”


아코디언 아이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다만 숨을 멈춘 듯한 표정으로.


“너는 누군가를 죽인 내가 무섭지 않아?”


검은 자아가 아코디언 아이에게 물었다.


그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난, 날 죽였으니까.”


그 말은 우리 모두의 가슴을 찔렀다. 침묵이 공간을 메웠고,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심장을 꺼내어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그’가 다시 나타났다. 운명, 혹은 조종자. 우리를 이곳에 불러들였고, 죽음으로 인도한 그 그림자의 형체.


그는 천천히 걸어왔다. 여전히 웃고 있었고, 눈은 비어 있었다.


“아직도 모르겠니? 너희는 모두, 날 만들기 위해 살아온 거야.”


그의 말에 술집 여자가 성큼 걸어 나갔다. 그녀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우릴 조종했다고? 우리가 그렇게 죽도록 만들었다고?”


“아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단지, 너희 안에 있던 파편을 비춰줬을 뿐이야. 너희가 만든 너희를, 너희가 바라보게 한 거지.”


그는 미소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공간이 일렁였고, 각자의 기억이 한꺼번에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찬란했던 무대, 꺼져버린 조명, 숨 막히던 연습실, 피로 얼룩진 전장, 어둡고 좁은 방, 비가 새던 지하 술집,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방 안.


그 모든 기억이 겹쳐지며, 우리는 다시 한번 무너졌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우리는 서로를 부여잡았다.


소녀는 노래를 불렀고, 아코디언 아이는 화음을 얹었고, 술집 여자는 허공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모두를 잊고 싶었던 나, 존재조차 잊힌 나는 손을 내밀었다. 피리를 불었던 나 역시 그 손을 잡았다.


우리는 비명을 지르며 하나의 선율을 만들기 시작했다. 불협화음 같던 소리들이 엉겨 붙고, 겹쳐지고, 떨리며 어딘가를 향해 울려 퍼졌다.


그때, 조종자의 웃음이 멈췄다.


“이건…”


그가 뒤로 물러섰다. 마치 그 소리에 상처라도 입은 것처럼.


그때, 노래 소녀가 마지막 한 소절을 불렀다.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너는 나였고, 나는 너였어. 하지만 이제, 나는 나로 살아갈 거야.”


공간이 찢어졌다.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처음으로, 진짜로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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